신약성경, 그러니까, 헬라어 성경에서 교회라는 말에 쓰인 단어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문명권에서도 쓰였던 단어이기도 하고, 또한 히브리사람들이 차용해서 썼던 단어이기도 합니다.
옛날 구약 이스라엘이 망하고 뿔뿔이 흩어졌다가 일부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고향땅으로 돌아와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옛날의 기세와 위용을 결코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보통 (바벨론) 포로후 시대라고 하는 시기와 중간사(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기록 연대의 중간에 해당하는 시기) 시대는 열강들이 득세하던 때였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왔던 일부분의 유민들이 제대로 된 유대나라를 다시 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초라하기는 했지만,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고 나라의 꼴을 갖추려고 노력하였으며, 자신들의 쓰라린 패배를 기억하고, 그러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과거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할 때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성전도 초토화되어 버렸고, 그들은 성전이 있는 고향땅, 고국을 등지고, 포로가 되어 줄에 묶여서 줄줄이 바벨론으로 끌려왔었기 때문에,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그들의 종교와 민족의 중심인 성전 대신, 회당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옛이스라엘 고토에 돌아온 유대백성들은 성전을 다시 세우고,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재건한 다음에, 다시 성전 중심의 예배를 회복시키기는 했지만, 예루살렘 지역 이외의 지역들에서는 계속해서 회당모임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고나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고국땅으로 되돌아오지 않고, 지중해 지역 전역에 흩어지면서 퍼져나갔으며, 특히 지중해 지역의 대도시들에 모여서, 자기들의 군락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중해 지역의 열강의 흥망성쇠에 따라서, 알렉산더가 그 지역을 통일하게 되면서, 비록 알렉산더는 일찍 요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헬라문화와 문명은 지중해 지역의 표준적인 문화와 문명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헬라어는 다중 인종, 다중 민족들이 모여 있는 지중해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면의 공용어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새로 태어나는 세대들은 자연스럽게 헬라어권에서 성장하면서 헬라어를 일차언어, 일종의 모국어(mother tongue 태생어)로 사용하게 되고,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따로 배워야 하는 언어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과 다메섹 지역까지는 여전히 아람어가 일차 언어였지만, 다른 지역출신의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기본어로 해서 성장하고, 생활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하며,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기본적인 규범인 히브리 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나오게 된 것이 바로 칠십인경(LXX)입니다. 그리고 헬라어를 기본생활언어로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헬레니스트(hellenists)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칠십인경(칠십인역)에, 즉 헬라어번역본 구약성경에 지금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성경을 번역하던 사람들이 히브리어 중에서 모임과 회집과 공동체에 해당하는 단어인 ‘카알‘과 ‘에다‘라는 단어를 에클레시아로 번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구약성경 안에도 교회라는 말이 — 더 정확히는 교회에 해당하는 말이 — 들어가 있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신약에서 교회를 말할 때 쓰인 단어로서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헬라어역본 구약성경인 칠십인경에 이미 100여 차례나 쓰였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에클레시아, 즉 교회라는 말이 이미 지중해지역의 유대인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던 단어였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칠십인경(셉투아진트)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어떤 식으로 사용되고 있느냐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논란이 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원래 고대 고전헬라어에서, 정치적인 논의를 위해서 소집된 시민들의 회의를, 집회를 뜻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모임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핵심은, 모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노선을 따라서 논리를 하는 학자들은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혹은 “언약공동체“라는 어떤 실체, 단체를 뜻하는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그저 중립적으로 차용되어, 전유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칠십인경에서 이 말이 원래 히브리어 ‘카할‘을 번역할 때 사용되었고, 카할이라는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 역시 집회, 한시적인 모임을 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말할 때에는, 따로 ‘에다‘라는 말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다라는 단어는 에클레시아가 아닌 ‘수나고게‘라는 말로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에클레시아라는 말의 (중립적인, 중성적인 용법이 아닌) 신학적 의미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신약에서 차용하여 전유(專有 appropriation)하고 있는 맥락은 이 말이 집회, 어떤 한시적인 모임보다는 그 모임에 모인 사람들 전체 – 하나님의 백성, 언약공동체, 이스라엘 – 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모임 혹은 집회, 회집의 사건보다는 그 사람들, 그 회, 그 공동체, 그 몸, 몸통을 가리킨다는 것이지요.
저의 입장은 이 두 가지 의견을 다 반영하는 것입니다. 원래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고대세계에서 종교적인 함의를 담지 않은 말은 거의 없습니다. 말과 삶의 컨텍스트자체가 종교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이다, 모으다 라는 동사에서 모임이라는 명사가 파생할 경우, 모임이라는 말은 모이는 활동 자체, 집회 혹은 회집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아무개의 모임(이를테면, 청우회, 신우회 등등)이라는 말은 그 모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 전체를 표시합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번역어가 원래 대신하고 있었던 히브리어 카할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할이라는 단어 역시 처음에는 모임, 집회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구약성경에서, 점차로 후대로 들어서면서, 그 모인 사람들 전체를 대변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들은 대부분 이렇게 시간을 따라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 와전되어 사용되는 것이 통례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의 구분과 연결이 중요한 이유는, 교회를 바라볼 때에, 에클레시아 혹은 카할이라는 말을 오직 중립적인 회집, 집회로 보는 사람들은 교회를 모임의 입장, 결사의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하며, 따라서, 개교회중심적 방향을 지지하게 되며, 에클레시아 혹은 카할을 신학적인 의미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교회를 전체적으로 하나인 교회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가지점을 이 단어들이 다 가지고 있으며, 신약의 교회(사회학적 실체로서의 교회라는 현상)도 이 두 가지 점을 다 지니고 있었고, 오늘날도 이 두 가지점을 다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이라는 말을 쓰자면,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