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개척 역사는 청교도들의 눈물의 감사로 시작되었다. 청교도들은 항해술이 취약했던 1620년 오직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모든 위험을 불사하고 메이플라워(Mayflower)호에 몸을 싣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다. 180톤의 메이플라워호는 146명이 항해하기에는 작은 배였으며, 사람들은 항해 도중 파도의 위험 뿐만 아니라 극심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다.
620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날, 그들은 117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Plymouth,Plymoth) 해안에 상륙했을 때는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다. 그들은 추위한 식량부족으로 영양실조에 걸렸으며, 전염병까지 돌아 봄이 오기 전에 44명이 목숨을 잃는 뼈저린 아픔을 겪었다.
더군다나 신대륙의 기후조건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보리와 밀을 가지고 와 토양이 다른 낯선 땅에 심어 첫 농사에서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에 시달렸고 극심한 추위에 고통을 당하며,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때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어려움에 처한 그들을 도왔다. 추장인 사모세트는 몇 종류의 씨앗을 가져다주었고 재배법도 알려 주었다. 그의 직접적인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의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다.
이에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함께 잔치를 열었다.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해서 함께 나누며 신대륙에서의 첫 추수감사절을 가졌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이 된 것이다.
[복원한 메이플라워호]
신대륙에 도착한 후 3년이 지나서 매사추세츠 주지사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감사절을 제정하여 모든 청교도들이 지킬 것을 공포하였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금년에 풍부한 수확을 주셨습니다. 인디언의 도움을 받아 옥수수, 밀, 콩, 호박과 여러 채소를 심게 해주셨고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숲에서 사냥을 하게하시고 바다에서 생선과 조개들을 넉넉히 거둘 수 있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야만인의 습격에서 보호해주시고 여러 질병에서 지켜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선포합니다. 주후 1623년 11월 29일 목요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모여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이 모든 축복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릴 것을 선포합니다.“ –윌리엄 브래드퍼드
이렇게 추수감사절은 매사추세츠주와 코넷티컷주에서 연례행사로 치루어졌으며, 점차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다가 789년 미국의 초대대통령인 워싱턴이 11월 26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하고 온국민이 이 날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대 대통령인 제퍼슨은 추수감사절이 왕정시대(미국이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기간)의 관습이란 이유로 중지시켰으며, 그 후로 50년 이상 중단되었던 추수감사절 행사를 링컨대통령이 국가적인 국경일로 선포하여 다시 ‘추수감사절’이 부활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이 첫발을 디뎠다는 바위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
링컨은 국경일로 제정하며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나는 우리의 경건한 조상,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감사의 씨로 뿌린 신앙의 유산을 우리 후손들이 잘 계승하도록 이날을 국가 축제일로 선포합니다”
그 후 역대 대통령들이 추수감사절에 ‘감사 메시지’를 발표하는 것은 전통이 되었다.
“험하고 고생스러운 시대에 초라한 경제력을 가졌던 우리 조상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는 훨씬 편하고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위기는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26대 대통령)
플리머스 [Plymouth]
미국 플리머스 만에 면한 도시로 보스턴 시에서 남동쪽으로 60㎞ 떨어진 곳에 있다.
뉴잉글랜드 지방에 세워진 플리머스 식민지(원래 뉴플리머스 식민지라고 했음)에 처음으로 세워진 유럽인 영구 정착지였다. 시를 처음 세운 사람들은 영국성공회를 탈퇴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필그림들이었다.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를 출발했던 이들은 1620년 11월 케이프코드 연안에 도달했다. 이어 12월 21일 정찰대가 지금의 플리머스 시 근처까지 들어왔는데 이 날은 현재 ‘선조들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해 12월 26일 필그림들이 플리머스 록에 상륙했으며, 최초의 요새와 망대를 베리얼 힐에 세웠다. ‘묘지가 있는 언덕‘이라는 뜻의 베리얼 힐에는 실제로 윌리엄 브래드퍼드와 최초로 이 지역에 도달한 사람들의 무덤이 있다. 첫해 겨울 필그림들의 반 수 정도가 죽어서 콜스 힐에 묻혔다. 사람들은 콜스 힐을 평평하게 다듬어서 인디언들이 새 정착자들의 사망자 수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곡식을 심었다. 공식적으로 인가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1633년에 이곳은 플리머스 식민지의 행정중심지로 인정받았다. 1691년 플리머스 식민지는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로 통합되었다.
해안에 있고 역사적인 의의가 깊은 곳이어서 시는 여름 휴양지로 인기가 높다. 따라서 관광업이 경제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밖에 밧줄 제조를 비롯한 경공업과 어업, 넌출월귤 재배 등도 경제적으로 중요하다. 초기의 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 기반은 대부분 해상활동이었으며, 지금도 부두와 소형 선박 수리소들이 이용된다. 시에는 초기의 필그림 마을을 재현한 플리머스 플랜테이션(Plimoth Plantation), 1824년에 지은 필그림 홀 박물관, 17세기 여성들의 가사활동을 묘사한 할로올드 포트 하우스, 메이플라워 2호 등 다양한 역사적 기념물들이 있다. 특히 메이플라워 2호는 영국의 브릭스햄에서 제작되어 1957년 53일에 걸쳐 친선호로서 대서양을 횡단했다. 초기 식민지시대의 가옥들도 재건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는 현재 메이플라워 협회의 본부로 사용되는 에드워드 윈즐로 저택이 있다.
1741년 최초로 확인된 플리머스 록은 독립전쟁 직전의 소요기였던 1774년 자유의 상징으로 추대되었는데 리버티폴 광장으로 옮기던 중 쪼개졌다. 현재 이 바위는 원래의 위치대로 바닷가에 있으며, 화강암 기둥과 지붕으로 보호되어 있다. 시 뒤쪽에 있는 언덕에는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 1889년에 세워진 높이 25m의 국립기념비(필그림 기념비라고도 함)가 있다. 4,415㏊에 이르는 마일즈 주립산림지 대부분이 시계 내에 속해 있다. 인구 51,701(2000).
(출처:브리태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