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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들의 시험 (존 오웬)

믿는 자들의 시험

존 오웬

내재된 죄의 유혹

죄는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유혹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끌려다니고 “미혹된다”(야1:14). 죄는 인간의 이성을 의무로부터 물러나게 하고, 대신 감정을 유혹한다. 우리는 세 가지를 고려해볼 수 있다:

①감정에 대한 죄의 유혹

②죄가 어떻게 이것을 성공하는가

③그리고 이 위험에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자세

감정이 죄에 의해 일깨워질 때, 그것은 덫에 걸린다. 왜냐하면 죄가 만연할 때, 그것은 완전하게 그 안에서 감정들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죄는 계속해서 사로잡힌 이미지로 상상력을 지배한다. 사악한 자는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들은 항상 그것을 실행한다(미2:1). 베드로는 그들이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벧후2:14)한다고 말씀한다. 그들의 상상력은 계속해서 그들의 욕망의 그 대상들로 자신의 영혼들을 가득 채운다.

한 사도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요일2:16)라고 기술하였다. 안목의 정욕은 영혼에 들어가서 그 상상력을 구체적으로 대상화시킨다. 요한은 이것이 “안목의 정욕”이라고 언급하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계속해서 이성과 영혼에 이 이미지들을 그려보이기 때문이며, 이는 우리 육신의 눈이 뇌에 바깥 사물의 이미지들을 구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눈은 종종 이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여호수아 7장 21절에서 아간은 죄가 어떻게 그를 지배해가는가를 보여준다. 첫째, 그는 금과 바벨론 의복들을 보았고, 그후 그는 그것들을 취했다. 그것들을 보고, 그는 그것들의 가치를 그에게 상기시켰고, 그리고 그후 그는 그것들을 자신의 욕망으로 고정시켰다.

죄의 유혹은 그 상상력이 이성을 지배할 때 증대된다. 그것은 헛된 생각을 이성 속에 자라게 하고, 그리고 비밀리에 자기도취에 빠지게 한다. 우리가 금지된 물건에 대한 생각으로 기뻐할 때,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이며, 비록 우리의 의지가 행동으로 실행하는데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예언자는 물었다, “네 악한 생각이 네 마음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렘4:14). 이 모든 생각들은 메신저처럼 왔다 가며, 그것으로 죄를 실행하게 된다. 그러한 생각들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정들을 더욱 더 자극한다.

이미 살펴본대로, 죄는 항상 이성에 죄의 심각성을 경감시키고 경시하게 한다. “그것은 작은 실수일 뿐이다”라고 그것은 말한다. “그것은 금방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변명들로 죄는 미혹된 영혼들에게 말을 건넨다. 영혼의 일부분이 이 은밀한 음성-거짓 술수로부터 비롯된 비밀스런 아부-에 귀기울일 준비가 될 때, 감정은 이미 꾐에 빠졌음이 명확하다.

영혼이 순순히 이러한 유혹들을 경청할 때,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감정들을 잃어버린 것이고,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죄는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는”(잠23:31) 포도주처럼 유혹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죄는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다”(잠23:32)

감정들을 유혹하고 얽어매고자 어떻게 죄가 속이는가?

첫째, 그것은 이성의 성향을 이용한다. 만일 이성이 영리한 새와 같다면, 죄는 그것을 잡아채지 않을 것이다.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잠1:17) 그러나 만일 그 새가 정신을 빼앗겼다면, 그 날개는 그 올무에서 벗어나는데 거의 쓸모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죄는 유혹한다. 그것은 거짓 이론과 구실들로서 위험에대해서 이성을 눈멀게하고, 그후 그를 얽어매고자 감정에 그물을 던진다.

둘째, 죄는 생활의 격언들을 이용하고, 죄가 바람직한 것이라고 제시한다. 죄는 상상을 통하여 “죄악의 낙”(히11:25)을 누리도록 촉진시키기위해 수천가지의 거짓으로 물체들을 도금한다. 사람이 모세처럼 이 쾌락들을 경시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것들로부터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죄 안에 사는 자들은 사도가 말씀하시길, “연락하는”(야5:5) 자들이다. 그것은 그것들에 대한 욕망에 육신을 ?추기 때문에 즐겁다. 그래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는 경고가 주어진 것이다. 육신의 정욕으로 너 자신을 허비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그 정욕은 죄가 당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통하여 불어넣은 것이다. 우리에게 “육체의 욕심을 채우지 말라”(갈5:16)고 또한 경고하신다. 인간들이 죄의 권세 아래 살 때, 그들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엡2:3)을 행하게 된다. 죄는 영혼을 꾈 때, 죄를 무언가 아름답고 만족을 주는 것으로 색칠함으로써 영혼을 유인하는 상상력을 설득한다.

셋째, 그것은 죄와 함께 수반되는 위험을 감춘다. 죄는 덫을 미끼로 감추고, 음식을 그물 위로 뿌린다. 물론, 영혼이 위험을 감지하는 것을 죄가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는 사실을 제거하거나 혹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인정하심”(롬1:32)을 숨길 수는 없다. 그러나 영혼이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하도록 죄의 미혹과 욕망으로 마음과 감정을 사로잡고 휘감는다.

인간의 타락에 관하여, 하와는 적당하게 뱀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3). 그러나 사탄은 즉시 그녀의 마음을 그 실과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으로 채웠고, 그녀는 먹는 결과에 대한 실제적 중요성을 쉽게 망각하였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죄의 중요성을 망각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겼다(삼하12:9).

죄가 맹렬한 압력으로 유혹할 때, 그것은 주님의 공포로부터 영혼을 감추기 위해 수천의 계략을 사용한다.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소망들이 그것을 숨기는데 사용되곤 할 것이다. 정욕, 현재의 특별한 경우 혹은 기회에 대한 집착들이 이성을 가리우듯이, ‘나중에 회개하면 된다’고 또한 가리운다. 죄는 많은 다른 변명들을 사용해서 환경, 놀라움, 의무의 균형, 상상력의 강박관념, 그리고 절망적인 결과들을 축소시킨다. 그것은 그렇게 수천의 변명들을 이용한다.

그 후, 죄는 죄를 원하는 생각을 품도록 하기 위해 이성과 논쟁하기 위해 전진한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것을 살펴볼 것이다.

이제 그러한 죄의 속임수를 피할 수 있는 방책을 살펴보자.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한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3).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킨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골3:5)을 죽임으로 우리의 감정을 지킨다. 사도는 “네 지체 안에서 죄가 역사하는 것과 속이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 당신의 감정들을 하늘의 것에 고정시키고 또 그것으로 채우는 것이 죄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의 대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영광 안에 계시는 하나님 자신과; “만 사람에 뛰어난”(아가서 5:10, 16) 우리 주 예수님; 은혜와 영광; 복음의 신비로움; 그리고 복음으로 약속된 축복들을 의미한다. 만일 이것들이 우리의 생각들을 사로잡는다면, 우리의 영혼 어느 곳에 죄가 유혹하려 침투할 수 있겠는가?(고후4:17-18절 참조)

둘째, 우리의 감정들을 사형틀 위의 예수님께 맞추자.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들을 나무 사형틀과 예수님의 사랑에 고정시킨다면, 그는 세상 것을 죽은 희망 없는 것으로 못 박을 것이다. 죄의 미끼가 마력을 잃고 사라질 것이다. 당신의 감정들을 예수님의 희생으로 채우라. 그러면 당신은 죄를 위한 어떠한 공간도 남겨두지 않게 될 것이다. 세상은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셨을 때, 그분을 집 밖 마굿간으로 내몰았다. 그분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오실 때, 그분이 문밖으로 세상을 던지실 것이다.

하늘의 것에 대한 우리 감정의 열정은 그것이 지속적으로 살펴지고, 실천되고, 지배되고 그리고 경고되지 않으면 쉽게 꺾여진다는 것을 또한 기억하자. 하나님은 성경에 첫사랑을 잃어 자신들의 감정이 쇠약해진 자들에 관하여 종종 말씀하신다. 우리 영혼이 그렇게 뒤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보다 경계하자.

시험의 힘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은 믿는 자들의 큰 의무이다. 하나님은 사실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신다”(벧후2:9). 그러나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커다란 의무이다. 우리의 구세주는 자신의 제자들을 염려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며”(마6:13). 우리 주님은 시험의 힘을 아시기에, 그것을 말씀하셨고, 그분은 얼마나 우리가 그것에 공격받기 쉬운 줄을 아신다(히2:18). 그분은 우리에게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순종에 대해 상을 주신다(계3:10).

시험을 면하기 위해 시험의 힘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시험은 많은 기본적 이슈들을 초래하기 때문에, 성경은 그것에 관해 많은 말씀을 하신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얇게 흙이 씌워진 돌짝밭에 뿌려진 씨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신다.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눅8:13). 말씀의 가르침은 그들을 감동시킨다. 그들은 믿는다. 그들은 고백을 한다. 그들은 몇몇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눅8:13). 한번 시험을 받으면 영원히 가버린다.

이처럼, 마7:26에서 예수님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에 관하여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믿음을 고백한 이 집에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그의 거주자를 보호한다. 그것은 그를 따뜻하게 지켜주고 잠시 동안은 유지된다. 그러나 비가 쏟아질 때(즉 말하자면, 시험이 오면) 그것은 완전히 부숴진다. 이 어리석은 자는 유다와 같은 자로써 우리 구주를 3년씩이나 따르던 자였다. 모든 것이 처음에는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시험에 들어 – 사탄이 그를 까불렀을 때-그는 잃어진 자가 되었다. 데마는 세상의 사랑이 그 영혼에 들어갔을 때까지 복음을 전했으나 그 이후 그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하나님의 성도들 중에서 우리는 시험의 거대한 힘을 볼 수 있다. 아담을 보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고귀하고, 의롭고 거룩했다(눅3:38). 그는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꾐에 빠지거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때 말이다. 그러나 아담이 시험을 받자마자, 그는 불완전해졌고, 잃어버렸고, 파멸되었으며, 아울러 그와 함께 그의 모든 후예들도 그렇게 되었다. 우리의 시험에서 우리가 교활한 악마와 뿐만 아니라 저주받은 세상과 부패한 마음과 흥정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으로 추천될 만큼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의 아버지라 불린다(롬4:11-17). 그러나 두 번 그는 동일한 시험에 들었다(즉, 그의 아내로 인한 두려움). 두 번 모두 그는 죄를 지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였고, 의심할 바 없이 그의 영혼은 평안을 잃었다(창12장과 20장을 보라).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삼상13:14)이었던 다윗 역시 시험에 들었다. 또한 노아, 롯, 에스겔, 그리고 베드로 역시 우리에게 교훈으로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시험에 들었다. 예후의 편지를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우리는 “두 왕이 저를 당치 못하였거든 우리가 어찌 당하리요”(왕하10:4)라고 물을 것이다. 따라서 사도는 우리에게 죄에 빠진 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기록하였다.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살펴보고 검증하여야 하며, 그리고 시험의 힘과 효율성에대해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견딜 힘도 정렬도 없다. 확신은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약점을 생산할 뿐이다. 이는 가장 나쁜 형태의 약점으로 배반과 흡사하다. 그러나 성이 아무리 단단하다할 지라도 만일 배반을 모색하는 부분들이 그 안에 포진해 있다면(최초의 기회가 생기면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성은 적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배반자들이 우리의 영혼을 좀먹고 모든 시험에 영합하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

시험의 힘을 감당할 수 있다고 네 자신에게 속삭이지 말라. 철저히 부셔지거나 아니면 완전히 충족되지 않으면 결코 포기되지 않는 은밀한 욕망들이 네 영혼 속에 숨어있다. “하사엘이 가로되 당신의 개같은 종이 무엇이관대”(왕하8:13). 그렇다, 당신이 만일 시리아의 왕과 같다면 당신은 그런 개가 될 것이다. 시험과 이기주의는 당신의 인간성을 말살시킬 것이다. 우리는 정욕적인 생각을 기피하지만, 일단 시험이 우리 영혼에 침투하면, 모든 반대되는 이유들은 정복되고 침묵한다.

시험의 힘에 대비하는 부적절한 대비책

그러한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영혼이 인간의 본질적인 실체이다. 만일 사람이 믿지 않는 자이면서, 신앙고백자라면, 그의 영혼은 무엇을 할까?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잠10:20) 외형적으로 그것이 가치가 있어 보일지라도, 내면적으로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험의 범주는 영혼에 있고, 믿지 않는 자는 그것이 폭포처럼 밀려올 때 그것에 견뎌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누구도 그 자신의 영혼을 신뢰해서는 안된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잠 28:26) 베드로가 자신을 자랑할 때 그러하였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마14:29). 그것은 그의 어리석음이자 그의 자기-확신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시험이 오기 전에는 그토록 아름다운 약속들을 한다. “만물 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17:9). 시험이 닥쳤을 때, 그것은 수천가지의 변덕과 배반을 일삼고, 시험은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호4:11)듯이 마음을 빼앗는다.

우리는 우리가 종종 시험의 때에 영혼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부적절한 방법들을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1. 세상 명예에 대한 사랑

자기의 지위와 직업에 의해 사람은 교회에서 존중과 존경을 얻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을 논쟁한다, “이 정욕, 혹은 그 유혹, 혹은 이러 저러한 공적인 악과의 거래에서 무릎 꿇음으로인해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러한 명성을 잃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는 마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공격에 방어막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강한 논쟁처럼 보인다. 그들은 심지어 교회에서 그들의 평판을 잃는 것보다 차라리 죽겠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의 별 삼분의 일”(계12:4)은 무엇인가? 그들이 창공에서 빛나지 않았던가? 그들이 전적으로 그들의 영예, 지위, 세력, 그리고 명성에 무지했던가? 용이 그의 시험들과 함께 왔을 때, 그는 그것들을 땅으로 던졌다. 명예욕보다 더 좋은 방어막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시험을 다루는 데 있어서 부적당한 장비를 갖춘 것이다. 슬프게도, 위대한 명성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유일한 방어막이 자신들의 훌륭한 이름에 놓여있을 때 그 파멸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하늘의 별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당신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2. 수치와 치욕에 대한 두려움

시험들에 따라오는 수치와 치욕을 자기 자신에게 인지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관심은, 그러나, 세상의 주목을 받고 질책을 당하는 공개된 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 동기들은 양심의 죄나 마음의 죄를 다룸에 있어서는 무의미하다. 시험에 대적하기 위한 우수한 방어막으로서 이것에 의지할 때는 무수한 변명들이 그 마음에 제공된다.

3. 마음의 평안을 깨지 않고, 양심을 상처내지 않고, 혹은 지옥불의 위험을 겪지 않으려는 소망

이것이 시험의 때에 사람들을 지키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중요한 방어막으로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하나님과의 평안을 유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몇가지 이유들로 이 동기가 유일하게 유효한 것은 아님을 지적한다.

누군가의 평안은 추정과 거짓 희망으로 이루어진 거짓된 안정이라는 느낌만을 제공한다. 심지어 믿는 자들도 이것에 집착한다. 다윗은 나단이 그를 보러왔을 때까지 거짓 평안을 누렸다. 라오디게아는 파괴의 가장자리에서 쉬었다. 사디스의 교회는 또한 죽음에 처해있을 때 평안이라고 주장했다. 진정한 평안이란 우리를 지키시는 예수님 안에 있는 것으로서 그 외는 없다.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지키시지 않는 것으로 현재 우리를 지킬 수 없다. 거짓 평안은 부러진 잣대로써 그 위에 놓여진 손을 찌를 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지키기 원하는 진정한 평안마저도 시험의 때에 방어막으로서는 쓸모없을 때가 있다. 왜? 우리가 변명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 사단은 매우 하찮은 거야”, 우리는 말한다. 혹은 우리는 그것이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혹은 그것이 공개적이고 명백하게 양심을 찌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면서 그러한 변명들로 우리는 합리화한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의 다른 사람들도 타락했었으나 평안을 유지하였고, 그것으로부터 회복되었다고 합리화한다. 마치 성을 에워싸고 있는 포병대와 같은 수많은 그러한 변명들에 부딪쳐서 그 영혼은 마침내 항복한다.

만일 우리가 오직 평안을 유지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면, 대적은 우리를 다른 방향에서 공격할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의 방어를 위한 갑주의 일부분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고 명령받았다. 만일 우리가 방어하는데 있어서 그 한가지 원소에만 의존한다면, 시험은 20가지의 다른 방법을 써서 침입하고 승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속된 마음, 불의의 재물, 복수, 자만심,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로 시험받을 수 있다. 만일 그가 평안이라는 방어수단에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는 다른 필수적인 것들을 무시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그 자신의 개인적 교제를 게을리 할 것이며, 혹은 세속적인 자신의 속성을 그냥 지나칠 것이다. 결국 그를 괴롭히는 가장 확실한 시험에 굴복할 것이다. 이 마음의 평안이 방어수단으로서는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험들이 있다. 그가 누리는 평안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성도들은 없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험의 날에 실패하는가!

4. 하나님에 대적하는 죄를 경시하는 생각

하나님에 대적하여 죄를 짓는 것이 그 분의 은혜에 대적하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일 때, 어떻게 우리는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가? 불행히도, 우리는 이것이 확실하고 필연적인 방어가 아님을 매일 볼 수 있다. 그런 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이러한 동기들이 시험의 때에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가? 그 근원들이 그들의 불완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영혼의 보편적이고 습관적인 자세로부터 기인하며, 혹은 시험 그 자체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조언들을 경계해야 한다.

시험의 힘

이제까지 살펴본 것의 조명 아래 시험의 힘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시험의 힘은 마음을 어둡게 하고 그래서 사람이 그가 시험에 들기 전에 했던 것들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한다. 이 세상 신은 인간의 영혼을 눈멀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한다(고후4:4). 이처럼, 모든 시험의 그 본성은 시험받게 될 인간의 영혼을 어둡게 한다. 이것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첫째, 상상력과 생각이 어떤 사물로 꽉 차게 되어, 그것을 돕고 구원해줄 수 있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마음을 돌이키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주셨거나 혹은 그를 미워하신다고 믿도록 시험을 받을 수 있는데,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제시된 여러 방편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만큼 낙담하게 된다. 한편, 그는 자신을 목표로 하고 있는 시험에 마침내 사로잡히게 된다.

시험은 또한 영혼의 기질을 혼란시킴으로 인해 마음을 어둡게 한다. 당신 주위를 살펴보면 얼마나 쉽게 시험이 사람들의 감정을 미혹하는 지 알 수 있다. 소망, 사랑 그리고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대한)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나의 그의 눈이 감겼음을 지적할 것이다. 사물에 그의 현재의 판단은 추상적인 것이고 그의 의지는 박약하다. 광기가 재빨리 뒤따른다. 죄에 대한 증오, 주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존재에 대한 인식은 떠나고 마음은 대적들에게 기원할 뿐이다.

마침내, 시험은 우리의 욕망들을 일깨우고 자극시킴으로 해서 그 욕망들에 연료를 공급해주고, 끝도 없는 불안에 끌려들어 가게 된다. 하나의 유혹은 – 그것이 정욕이든 아니든 혹은 비뚤어진 태도든, 혹은 그밖의 다른 것이든 – 그의 절대적인 집념이 된다. 우리는 베드로의 세속적인 두려움, 히스기야의 자긍심, 아간의 사욕, 다윗의 부정, 데마의 세상사랑, 디오트레프스의 욕망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확실한 시험에 직면할 때까지 잘못된 행동에 대한 흥분, 성냄, 그리고 자긍심을 알지 못한다. 마음이 어두워지고, 그의 감정이 미혹되고, 그의 정욕들이 불타오르는 자들의 삶은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그의 방어막들은 부셔지고 만다. 그에게 무슨 희망이 남아있는가?

우리는 시험의 힘을 사회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공적인 시험들이, 계 3:10절에 언급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한다”. 그것들은 부주의한 믿는 자 세대들을 시험하기 위함으로 박해와 유혹이 섞여서 온다. 그런 공적인 시험 역시 그 형태가 다양하다.

첫째, 공적인 시험들은 복음을 경시하거나 가치없이 여기는 자들, 혹은 거짓 믿는 자들로서 배신자들처럼 행동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온다. 하나님은 징계로써 사단이 아합을 미혹하도록(왕상22:22) 허락하셨다. 진리에 대해 무시하고 열매없는 생활에서 세상이 인간을 어리석고 거짓되이 경배하도록 허락하도록, 하나님은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살후 2:11). 이러한 유혹은 이기적이고, 영적으로 간음하고, 부주의하고 세상적인 자들에 대한 심판상의 목적으로 오는 것이다. 아울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두게 하신다(롬1:28).

둘째, 어떤 공개적인 시험들은 신실한 듯 하나, 단순히 믿는 자라고 고백만 한 자들로부터 전염되어 확산된다. 예수님은 경고하셨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 몇사람이 게을러지고, 부주의하고, 세상적이고, 방종하게 될 때, 그들은 다른 자들을 파괴시킨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전5:6, 갈 5:9). 인간을 괴롭게 하는 쓴 뿌리는 또한 많은 자들을 더럽힌다(히12:15). 서서히 진리에 연약한 몇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한 영향을 끼친다.

셋째, 공개적인 시험들은, 강한 이유와 영향에 의해서 동반될 때, 극복하기에 너무나 어렵다. 이는 종종 점진적으로 발생한다. 식민지 주민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주할 때, 그들은 그 지역 주민들의 풍습에 적응한다. 이처럼, 풍요는 종종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부주의하게 만들고, 그것은 어리석은 자를 죽이고, 현명한 자를 상처낸다.

우리는 또한 시험의 힘을 개인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개인적 시험들은 정욕과 연합하여 영혼에 침투한다. 요한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 명예”(요일2:16)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것들은 원칙적으로 세상이 아니라 마음에 기거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상에” 있는데, 왜냐하면, 세상이 그들 속으로 들어가 그것들과 합쳐지고, 그것들과 연합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시험은 영혼 깊숙히 관통하고, 어떤 해독제도 그것에 미치지 않는다. 독이 피와 함께 혈관을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구나, 영혼의 모든 부분에 정욕이 주거하고, 그것은 그 사람 전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마음의 정욕(욕망, 혹은 허영, 혹은 그와 유사한 것들)은 다른 것들도 사로잡는다. 시험은 한 사람을 그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어떤 이들을 물을 것이다: “왜 시험에 대하여 그렇게 마음을 씁니까?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야1:2)고 명령하시지 않았는가?”. 그렇다, 우리는 이러한 시험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사도는 “부한 형제는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라”(1:10)고 권고하신다. 그러나 야고보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로다”(1:12). 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실 때는, 그분은 결코 우리를 꾀지 않으신다.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의 정욕으로 인해 시험당한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이 우리를 꾀어 미혹하지 않도록 깨어있자.

또한, 우리 주님 자신이 시험을 당하셨던 예로 어떤 이들은 반대할 수도 있다. 히2:17-18은 우리가 예수님이 시험받으셨던 것으로 위로받을 수 있음을 확신시킨다.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위대한 약속의 기반으로서 그들이 그분의 시험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사용하셨다(눅22:28). 그렇다, 우리의 구주께서 시험을 경험하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분의 시험이 세상과 그 왕자의 사악함을 통하여 그분에게 다가와서 그분의 육신의 날에 그분을 쳐서 넘어뜨렸던 사단 가운데 있었다고 간주하신다. 그분은 시험에 그 자신을 고의로 던지신 것이 아니다. 대신에 그분은 말씀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4:7). 더구나, 예수님은 오직 시험의 고통스런 부분만을 담당하셨을 때, 우리는 또한 그것의 죄짓는 면을 가지고 있다. 그분은 흠없는 분으로 남으셨지만, 우리는 흠이 더한 자가 된다. 결국, 어떤 이는 또 질문한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시험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합니까?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확신을 주셨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의도적으로 시험에 들어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실지는 의문이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6:1)

우리가 일부러 시험에 들고 우리의 영혼들의 근접한 피할 데만을 생각하는 것은 그른 일이다. 우리는 평안, 기쁨, 그리고 우리 영의 평화를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한다.

시험의 위험

시험의 힘을 측정해본 후, 우리는 이제 시험의 초기의 위험에 대해 살펴보길 원한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특별한 죄를 지었을 때 궁금해한다. 차라리, 우리는 물을 것이다, “내가 시험에 들었나” 우리는 죄에 끌려들어 갔을 때마다 시험에 드는데, 왜냐하면 모든 죄는 시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야1;14-15 참조). 죄는 오직 그 뿌리로부터 파생된 열매이다. 심지어 놀라거나 혹은 그 과실에서 무서워하는 것조차 시험당하는 것이다. 사도는 말씀하시길,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 종종 우리는 첫 위치에서 어떻게 시험이 시작되었는지를 깨닫지 못한 채, 우리를 두렵게 하는 죄에 대해 후회한다. 이것은 우리가 죄에 한번 더 빠지게 하는 것이다.

시험에 드는 것도 다양하다. 그것은 종종 감춰지고 은밀한 방법으로 시작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경건, 혹은 지식, 혹은 학식에 대한 평판을 가진 것으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칭찬한다. 그의 허영은 그것을 듣기를 좋아하고, 그 때 그의 평판은 그의 자존심과 야망을 자극한다. 만일 이것이 계속 된다면, 그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구하기 시작해서, 모든 그의 정열을 자신의 가치, 명성 그리고 자기-영광을 세우는데 쏟을 것이다. 그 팽창에 대한 은밀한 눈을 가지고 그는 시험에 든다. 만일 그가 이것을 재빨리 그리고 사정없이 다루지 않는다면, 그는 정욕의 노예가 될 것이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롬13:14)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 안에서 때때로 그러한 거짓 동기들을 허용하신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인의 야망, 자긍심, 그리고 허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로 그를 하나님께서 돌이키시고 그에게서 애굽의 정욕을 빼앗으신다. 그 후,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우상을 섬겼던 성전을 청소하신다. 그러나 시험이 교묘하게 파멸시킨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시험은 모든 직업과 부업을 잠재적 덫으로 이용한다. 어떤 이는 친구들과 동료들 그룹에서 자신이 사랑스러운 자, 칭송받는 자, 인기있는 자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생각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들어오면 시험이 그들을 꾀어낸다. 더 큰 영광을 구하는 대신, 그들은 자기 자신이 비천하다는 생각으로 인한, 굴욕 속에 생활하게 된다.

이처럼, 한 사람이 그가 복음의 가르침을 좋아하거나 혹은 사역에 있어서 어떤 분야의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때, 많은 것들이 그의 호의 안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의 능력, 명쾌한 메시지 전달, 대중 앞에서의 지속적인 노출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있어서의 그의 성공은 그를 시험에 노출시킨다. 이러한 것들이 시험을 가속화시킨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는 우리의 정욕을 살찌우려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시험에 드는 경향이 있다.

정욕들이 시험을 위한 기회를 찾을 때마다 인간은 시험에 든다. 시험에 드는 것은 단순히 시험에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힘에 말려들게 되는 것이다. 적당히 그 정욕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 시험으로부터 빠져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만일 바벨론 왕으로부터 대사관이 왔다면 , 히스기야의 자존심은 그를 시험에 던졌을 것이다. 하사엘이 시리아의 왕이 되었다면, 그의 잔인함과 야망은 그를 이스라엘에 맹렬하게 대적하였을 것이다. 만일 제사장들이 은과 함께 왔다면, 유다의 사욕은 즉시 그의 주인을 팔도록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의 사업, 당신의 생활방식, 혹은 당신의 문화의 어떤 요소들이 당신의 정욕들을 만족시키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시험에 들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부정한 생각들, 높은 지위에 대한 야망, 성적인 정욕, 음란서적에 대한 탐독, 혹은 그 밖의 것에 대한 그 사회에서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이용할 것이다.

더 나아가 아무런 진실한 만족, 기쁨 혹은 흥미없이, 부주의하거나 혹은 생기없이 행할 때, 의무감에서 연약하고, 게으르고 혹은 성의없이 행할 때, 그는 이미 그를 근심으로 인도하는 마음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봉사로부터 떠나, 그의 기도생활이나 혹은 성경을 읽는 데 있어서 게으르고 부주의하고, 그리고 무심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크리스챤(christians)의 새로운 본성은 본질적으로 예수님(Jesus Christ)에 의해 먹여지고, 강해지고, 살찌고, 그리고 즐거워진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은 이 관계와 소망을 가로막고 부수기 위하여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이다.

시험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깨어 기도할 수”(마26:41)있도록 근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시험에 들게된다면, 우리가 직면한 그 커다란 위험에 대해서 확실하고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항상 그 커다란 위험을 주지한다면, 그는 항상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다.

1. 그 커다란 위험은 시험에 드는 모든 사람에 해당하는 것임을 항상 명심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대해 부주의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를 감출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자기들의 마음속에 있는 시험의 기능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모든 종류의 모임에 얼마나 쉽게 동참하는가! 그들이 그것을 깨닫기 전까지, 그들은 사악한 모임들을 즐긴다. 나쁜 친구들의 위험성에 대해 그들에게 경고해도 너무 늦는다. 하나님께서 그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전능하신 방법으로 그들을 꺼내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잃어질 것이다.

소위 “자유”라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갈구하는가?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유혹하는 자들과 거짓 주장을 파는 자들 사이를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그 결과는? 대다수는 그들의 신앙을 잃어버린다. 시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또한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둘은 너무나 밀접해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단은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자, 그 열매를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내부의 연약함과 부정에 대해 도덕적으로 민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단의 실체와 책략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켜야한다. 우리는 우리에 대적하여 역사하는 시험의 힘과 죄의 사악함을 깨달아야한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부주의하고 냉담하다면, 우리는 그 유혹들로부터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시험에 들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우리 자신에게 주지시켜야 한다.

2. 우리는 시험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라.

먼저 “나는 연약하고 가난한 자입니다. 사단은 너무나 교묘하고, 너무나 교활하고 너무나 강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내 영혼을 빼앗기 위해 감시합니다. 세상은 모든 종류의 압력과, 동료들과, 그리고 변명으로 나에게 압력을 행사합니다. 내 본연의 타락과 부정은 거세고, 동요하고, 유혹하고 미혹합니다. 그것이 죄를 변명하기에, 그것은 내 안에서 그리고 나에 대항하여 늘 전쟁을 합니다. 시험을 위한 때와 기회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제 자신이 얼마나 깊이 죄에 빠져있는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 한 분만이 저를 지킬 시는 분으로 믿습니다. 저는 계속 주님만 바라봅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긴다면, 세 가지 것이 따를 것이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애로우심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다. 그분은 의지할 데 없고 갈 곳 모르는 자들에게 자신을 의지하라고 청하신다. 어떤 영혼도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하나님의 초청장만 믿을 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으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둘째, 우리는 우리의 위험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우리는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안에서 생활할 수 있다. 그분이 우리를 보호하실 것을 믿는 것은 사실 보호의 방편이다. 하나님은 확실히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시험으로부터 달아날 길을 예비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것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우리의 요청은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하심에 의해 정규화될 것이다. 믿음은 그 약속들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래서 평안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믿음 안에서 구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을 것이다(약1:5-7).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사35:8)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악한 것에서 건져내실 것이다. 당신의 삶의 기초를 그 약속 위에 세우고, 선하고 확실한 생활을 꿈꾸라. 우리가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이러한 자세로부터 얻을 축복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3. 기도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듦으로 인해 시험을 견디라.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보호하는 방편이다. 사람들은 종종 기도에 대한 이 자세를 유지함으로 인해 경험한 것들에 대하여 장황하게 이야기하지만, 그 연단, 능력, 그리고 효과는 대단한 것이다. 시험을 피하려는 자들은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이렇게 함으로 우리의 영혼은 모든 형태의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6:11)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6:18)

만일 우리가 기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시험 안에 거하게 된다. “하나님이여, 저의 영혼을 보호하시고, 제 마음과 모든 길을 지키시어 제가 미혹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매일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실천될 때, 눈앞에 놓인 시험이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다른 자들이 그 노예로 있을 지라도 우리는 자유할 것이다.

4. 인내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포함하는 것이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3:10)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약속과 동행한다. 우리는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고전10:13)고 말씀하시기에, 우리는 시험에서 반드시 지켜질 것이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히10:23)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우리가 이 약속 위에 섰을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역사하신다.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또한 그 아들의 신실한 은혜를 포함하고 있다. 그분은 약속하신다. “내가 너를 지키리라”(계3:10). 어떻게? “당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고전15:10절 참조). 바울은 시험으로 고통받았다. 그는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구하였고, 주님은 대답하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주님의 은혜는 우리를 지키시기에 충분한 것이다(히2:18, 4:16)

성령의 능력 역시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하신다. 그분은 “약속의 성령”으로 불리신다(엡1:13). 이는 단지 그분이 예수님의 재림을 약속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분의 약속들을 굳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 약속들을 따르는 자들의 영혼을 지키신다(사59:21).

5.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내에 관한 말씀을 지킬 때에 우리를 지키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때에, 시험에 빠지려는 경향에 대해서 우리의 영혼을 지킬 수 있다. 다윗은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25:21)라고 기도하였다. 반면,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57:21)고 말씀하셨다. 악인은 고해, 평안이 없는 광풍으로 가득찬 시험을 직면한다. 그들은 평안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옮기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우리의 영혼을 지키게된다.

부정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죽임으로 지킨다. 야고보는 시험이 우리의 정욕으로부터 비롯한다고 가르친다. 그것들을 제거시켜야만, 우리는 시험의 출발점을 없앨 수 있다. 바울은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갈2:20)고 말하였다. 주님께 가까이 있는 것은 그분과 함께 나무 형틀에 달리고 세상의 모든 속된 소망을 죽이는 것이다. 아간은 그 마음의 정욕을 죽이는 데 실패하였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수7:21). 죄가 그를 꾀였다. 그러나 죽은 마음과 사형틀에 못박은 생활은 우리를 이러한 것들로부터 지킬 것이다.

긍정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보다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채움으로써 지킬 수 있다. 바울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빌3:8). 새로운 것은 그만큼 좋은 것이다. 우리가 매일 주님의 은혜로우신 선을 맛본다면, 모든 다른 것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어질 것이다. 세 가지 요소들을 유지함으로써 이 좋은 것들로 영혼을 채운다.

그의 첫 번째 관심은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함께 하심은 그와 항상 같이 있다. 그는 예수님이 그의 영광에 관심이 있고, 그분의 계획은 “그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게”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골1:22). 그분의 성령은 이 일이 방해받을 때 근심하신다(엡4:30).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의 뜻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영혼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이다(고후5:14).

그의 두 번째 관심은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자신의 영광이다. 지상에서 예수님의 삶은 사단의 잦은 공격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분은 모든 것에 저항했고, 그분은 모든 것을 정복했고 그분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구원의 선장이 되셨다(히2:10). 예수님을 따르는 어떤 사람이 그의 삶의 시험 때문에 패배한 크리스챤으로서 생활하여 예수님의 승리의 실체를 부정할 수 있는가?

세 번째 그의 관심은 “허용”이다. 그는 예수님의 호의를 누리고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의 인정하심을 가치있게 여기고 그분과 대화하는 것을 배워왔다. 그는 예수님과 분리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믿는 자가 예수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킬 때, 그것은 단순히 그의 관심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삶을 주관하는 원칙에 영향을 미친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산다(갈2:20). 믿음은 그의 영혼에서 그가 가진 지혜, 지식, 그리고 자기만족의 관념들을 비우고, 그의 영혼의 모든 영역에서 활동하여, 예수님의 지혜와 예수님으로 충만함 속에서 생활을 하게 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 이것은 믿음의 역사이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살라. 한 사람이 그 자신을 믿을 때, “그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다”(욥18:7). 오직 믿음만이 자기교만으로부터 우리를 비울 수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자기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으로,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둘째, 그는 다른 사람들을 염려해야한다. 사람들이 시험들로 인해 허우적대지 않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사랑을 보여준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시69:6) 타인에게 베푼 선한 행위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그 반대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킬 것을 약속하셨다면, 왜 그토록 많은 신앙고백자들이 시험에 드는가? 그들이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바울은 불순종 때문에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11:30)라고 기록하였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와 그분과 가까이 동행하는 것을 경시하는 자들을 연단시키신다.

크리스챤들이 쉽게 실패하는 4가지 유형을 정리해보면, 첫째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기쁨과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에서 그들을 구하려고 하실 때, 세상에 순응한다. 둘째, 공적인 의무에 있어서 한 손과 다른 손에 대한 개인적 묵상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하라고 말씀하신 의무들을 그들은 경시한다. 셋째, 성도들 사이에서 그 공동체의 유대를 무시한 채 행동하고, 서로서로를 비방하며, 서로 싸우고 화합하지 못한다. 넷째, 그들은 이기적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사람들이 띌 때, 예수님의 인내에 대한 말씀은 그들 중에 열매가 없고,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으로부터 지키시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권면

만일 시험의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인내에 관한 말씀을 지키는 것을 막는 어떤 것에도 조심해야 한다. 다음의 경고들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네 자신의 충고, 지식, 그리고 생각을 믿지 말라. 둘째, 심지어 네가 너 자신을 정직하게(기도로, 금식으로,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어떤 특별한 정욕에 대하여 지키기 위해 교훈한다 해도, 너는 여전히 네가 세상적임, 세상에 순종함, 생활의 열매없음, 혹은 도덕적 무시라는 문제들에 있어서 무시한다면 너는 여전히 실패할 것이다. 셋째, 성도들의 안전, 유지, 그리고 일반적인 배도로부터의 보호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반면,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동행함에 대한 다른 면을 왜곡시키려는 변명으로서 이것들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 사람의 다른 영역에 집약된 난관들을 찾기 위해 “싸구려 은혜”로 자신들의 양심을 위안시킨다.

시험들과 관련된 특별한 당신의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켜 결정하도록 하라. 첫째, 당신이 칭찬의 우상과 마주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의 칭찬의 가치를 어떻게 넘어뜨리시는가를 관찰하라. 두 번째, 세상과 달리 물건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방법들을 살펴보라.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세상에 의해 무시되는 나머지 것들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얼마나 믿음과 기도를 강조하시는 지를 살펴보라. 인간의 모든 세력과 조언들보다 그것들을 귀하게 여기라. 넷째, 인간의 정욕들의 노예로 있는 세속적인 판단들로부터 하나님의 법규와 제도들을 회복하고자 하라. 성령의 아름다움과 권능 안에서 그 열매를 맺으라.

본질적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에 대한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경시하고 그들을 판단한다. 그것은 인간의 충고와 이해를 요구한다. 그것은 비성경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가서, 그분의 법규들을 흔들도록 허용한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우리는 근신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영혼의 순전한 안전을 소중히 여긴다면, 예수님의 인내에 관한 말씀들을 명심하라. 마음 속의 그 말씀의 틀 안에서, 예수님의 약속의 빛 안에서, 당신이 필요할 때 당신을 도우시는 예수님으로 기뻐하라. 당신의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으로서 그분에게 다가가라.

만일 당신이 병원을 방문하여 각 환자에게 병세를 물었다면, 그들은 대답할 것이다, “이런 저런 환경에 의해서 내가 그 병에 걸렸다”. 그들의 말을 듣고 당신은 그들의 환경에 처하지 않기위하여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겠는가?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잠6:27-28)

이제 우리는 세 가지 경고로 결론지을 수 있다.

첫째, 우리의 구세주께서 그것에 대하여 방심하지 말고 깨어 근신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시험을 무시한다면, 베드로를 기억하라. 오늘까지 당신의 부주의함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피할 수 있었다면, 당신은 무척 행운아였다. 그러나 깨어 있으라, 그리고 당신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다정하심과 참으심에 하나님께 감사하라.

둘째, 당신이 구원의 위대한 선장(히2:10)되시는 예수님의 감독 하에 항상 있음을 기억하라. 그분은 우리가 시험에 들어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기를 기뻐하신다. 예수님은 사나운 광풍이 일 때 제자들에게 이 경고로 교훈하셨다. 당신의 나태함에 대하여 그분의 천둥같은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셋째, 만일 당신이 이 일에 게을리 한다면, 시험에 들게 될 것이다 – 확실히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무거운 연단을 당신에게 허락하실 수도 있다. 그분의 분노의 증거로 심판을 가져오실 수도 있다. 당신은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 경고를 빈 말로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드러난 죄악과 그리로 이끄는 모든 방법들을 피함으로써 우리 영혼이 미혹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당신을 사로잡으려하는 함정들이 도처에 널려있는 당신의 사회적 관계들과 당신의 직장에 있어서 특별히 당신 자신을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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