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욥기 강해 설교
Derek Thomas / 서창원 역
욥의 세 친구들은 악의 존재를 신의 섭리로 보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그들은 욥의 고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욥의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위한 몇가지 정당성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욥기는 이 문제를 조사하는데 아주 유익하다. 해설자는 응보(應報)교리위에 전체 이론들을 세우고 있다. 욥은 경건하고 부요한 사람이었다(욥1:1-2). 이 부요한 환경을 깨트리는 무서운 재난이 임하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자식들, 부, 건강, 및 사랑하는 아내와 사회적인 덕망 등 모든 것을 상실하였다. 우리는 번영과 순종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인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곤경과 관련하여 나름대로의 기여를 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상황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드러내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사건을 조정하고 계신가? 그리고 그의 간섭하심은 정당한 것인가?
엘리바스에게는 욥이 큰 죄인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의 추측에서 부터 출발하고 있다. 무죄한 인간은 결코 항구적인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추측이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 욥은 무죄한 자중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의 죄는 하찮은 것이며 그의 고난은 곧 극복될 것이다.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4:6). 욥은 근본적으로 의로운 사람이요 잠시동안 하나님에 의하여 채찍에 맞을 뿐이다(5:17-18). 왜냐하면 유한한 존재에게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함이 있기 때문이다(4:17). 이와같은 견해는 욥의 고난에 대한 엘리바스의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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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에게는 욥이 심각한 죄를 범한 죄인이었다. 그는 즉각적인 응보(고난은 형벌이다)사상을 믿었다. 그리하여 욥의 자녀들을 한 사례로 인용하고 있다: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8:4). 그는 욥의 의로움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만일’이라는 말을 의존하고 있다. “네가 만일 청결하고 정직하면.”(8:6). 욥의 자녀들에 대한 이같은 추정은 전혀 근거가 없다. 이것은 자식들을 위하여 매번 속죄의 제사를 드린 욥의 행동에 반하는 것이다. 더우기 욥기는 욥의 자녀들의 방탕한 죄악들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문제의 핵심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응보의 원칙을 적용시키고 있는 빌닷의 냉정하고 분석적인 접근방식이었다. 욥의 죄악은 그의 자식들의 죄악만큼이나 심각한 죄악이라는 증거는 없을지라도 심각한 것이었다. 따라서 빌닷은 아직은 문제의 해결점이 있을 것이라고 피력하고 있다. 만일 그의 무죄함이 입증된다면 그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빌닷의 문제 해결점이었다.
소발에게는 욥이 남이 알지 못하는 죄악을 범한 죄인이었다. 욥은 그의 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을 보니 욥은 분명히 숨겨진 죄를 지은 자라는 것이다(11:4-6). 어쩌면 욥은 하나님께 범한 그의 범죄의 중량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지성 앞에 그가 피하여 숨을 만한 곳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욥의 죄악을 더 상세히 아신다.
그러나 이같은 욥의 세 친구들의 분석은 욥의 고난 문제를 해결하는 적절한 답을 주는 데 실패하였다. 결국 그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주해하기를 몇몇의 위안자들이 ‘한가지 노래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들이 누구를 위하여 노래를 부르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최종적인 분석에 있어서 욥기는 신정론 문제를 적절히 해결해 주려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칼빈이 욥기9:1-6을 강해하면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욥기의 목적은 다른데 있다: “욥의 세 친구들은 두가지 유형의 말을 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사람을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따라 응징하신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든지 우리는 잠잠해야 하며 불평을 터뜨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불평함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교훈은 사람이 가장 맹렬한 도발을 직면함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맡기고 순종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향에 따라 가도록 내버려 두신다면 우리에게는 혼돈 외에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하나님이 그의 뜻대로 우리를 다스리신다면 모든 것은 우리의 유익과 복지를 위함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에 대하여 칼빈이 욥기강해를 하면서 서론에 기록한 것만큼 더 분명히 설명해 주는 것은 없다.
이 강해에 수록된 것에 의하여 우리에게 보다 더 나은 유익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로 하여금 욥기의 개요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록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손안에 있게 되는지를 보여주며, 주님의 손 안에서 우리의 삶의 운명이 좌우되고, 또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적절하게 배치되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겸손과 순종으로 그의 뜻에 복종할 의무가 있는 것이 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욥기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계시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세가지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고 본다.
세가지 모형에 의하여 묘사된 욥
1. 다윗과 골리앗: 하나님의 용사로서의 욥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욥기의 서언의 중요성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욥기의 근본적인 의미와 메세지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이해하는 열쇠를 가져야만 한다. 욥기의 전체 무대는 하늘 법정이다. 하나님이 온 땅의 심판자로서 좌정해 계시는 모습은 본문의 모든 배경에 흐르고 있다. 주도귄을 쥐고 계신 분은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1:8) 욥은 하나님의 은총의 면류관으로서 상징된 자임이 틀림없다. 욥의 인물 됨됨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사단은 그것을 도전하려고 거기에 있는 것이다. 사단은 속임수와 사기행위로 욥의 됨됨이를 하나님에게 탓하고 있다. 욥의 삶의 문제를 누가 담당하는지를 증명하기 위한 법적 논쟁은 계획된 전쟁에 호소함으로 말미암아 진정이 되었다. 사실 욥기에서 더 큰 시험을 받은 자는 사단이었다. 욥기의 문제는 철학적 균형관계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문제는 결코 문제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외적인 비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님에게는 그의 절대 주권에 대한 포기가 없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처럼 다윗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하나님의 승리자이다. 하나님은 그의 절대 주권문제에 있어서 그의 참피언으로 욥을 선택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전쟁의 하나님께서 그의 종 욥에게 그의 거룩하신 이름의 영광을 맡기신 것이며 그의 구속 사역을 옹호하신 것이다. 이것보다도 더 고귀한 주제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전쟁은 사단이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것 말고는 뚜렷한 이유가 없이 고난을 겪고 있는 하나님의 수많은 자녀들의 삶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이다(엡6:11-12). 이것을 칼빈은 분명히 바라보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다스리도록 은혜를 주실 때 마치 우리를 처형대 위에 세우시듯 우리를 내몰아간다. 그러나 최후에는 우리 안에 그의 은혜로우신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있음을 알게 하며, 우리 안에서 사단을 대적케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을 때 필연적으로 하시는 것은 사단을 대항하여 우리 안에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또한 우리로 말미암아 그의 승리를 만드시는 것이다.
2. 야곱 모형
두번째 모델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주시는 마지막 38-41장 사이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선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고난문제에 대하여 설명을 하시려고 시도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정당화하시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욥에게 도전하고 계신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38:30). 이것은 고대 근동지방에서 주로 사용된 허리를 잡고 씨름을 하는 기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욥은 영적으로 허리끈을 단단히 매고 하나님과 씨름해야할 판이었다. 허리를 묶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브니엘에서의 야곱을 연상케 한다. 하나님은 욥을 다루시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으셨다. 또 욥도 자신에게 닥쳐온 고난에 대하여 자신의 무죄를 변호할 어떤 기회도 가지지 못하였다. 오히려 하나님은 욥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있는데 그것은 지혜의 결투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식의 시험이었다(38:3, 40:7). 그 시험은 연속적인 질문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땅을 덮고 있는 것들(38:4-21), 하늘의 것들(38:22-28), 및 동물세계에 관한 것들(38:39-39:30) 이었다. 결과적으로 욥은 묵묵부답이었다(40:1-5). 이 시힘은 욥의 지혜가 온전치 못하며, 인간은 한계가 있고, 피조된 존재임을 깨우쳐준 시험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감히 생색을 내고 있는 욥과 같은 온전치 못한 자를 용납하시는 것을 나타냈다. 욥과 계속해서 결투를 벌이시는 대신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 중 하나에게 그의 승리자인 하나님을 섬기도록 명령하셨다. 욥은 그의 경기를 치루었다. 하마의 의미를 설명하라고 물었을 때 욥은 설명 할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무고한 자의 고난은 하마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 만큼이나 인간에게는 어려운 문제이다. 납득되게 하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만이 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충분히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기에 있어서 전면에 나타난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방편들이 우리가 측량키 어려운 것이라는 것이다. 혜르만 바빙크가 그의 조작신학 신론 서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비는 교리의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mystery is the vital element of dogmatics).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도달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며(딤전 6:16),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다(신 7:21, 느4:14, 시48:1, 86:10, 95:3, 145:3, 단9:4). 하나님은 우리가 측량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는데는 역부족이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기는 하나,(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 안에서 우리의 이해 역량에 자신을 안주케 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언급하였다. ‘신실한 성도는 자신에게 계시된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예외가 없이 모든 것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묻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은 지혜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자신의 뜻을 우리로 하여금 인색하게 조금만 맛보도록 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는 뜻이다’. ‘심지어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도 거기에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문제를 이리저리로 신중하게 논의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그의 깊이나 높음에 대하여는 다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언제나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약간이라도 우리의 지혜의 역량에 따라 하나님의 오묘를 맛보게 해주심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 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칼빈이 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제시했던 원리는 큰 이슈가 되었다: ‘우리가 어제 시작한 메시지와 더불어 좀더 앞으로 나가보자 성경은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주 많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 강요에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토론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그의 모든 신성은 인간의 지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말하였다.
이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언급이다. 1542년에 쓴 그의 요리문답에서 칼빈은 그와 비슷한 말을 하였다: ‘우리의 지식은 그 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칼빈에게서는 고난중에 있는 성도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 주권적인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 인내하며 순응하는 것외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는 것은 야곱처럼 되는 길이요, 동시에 욥처럼 되는 것이다.
3. 아담의 모델
구속받은 인간으로서의 욥을 구속받은 자, 주권적 은총의 면류관으로 보는 것은 필연적 이다. 욥이 ‘중재자'(9장), ‘증인'(16장),또는 ‘구속자'(19장)를 사모하는 모습은 자신의 입장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기를 열망하는 자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캠벨 몰간 목사가 언급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문제를 발견하기까지는 욥에 대한 답변은 없는 것이다’. 욥의 모든 부르짖음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 안에서 그 해답이 발견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논쟁에서 욥은 자신과 성정이 같은 구속자가 그의 입장을 취하여 그를 위하여 변호해 주실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담의 타락한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욥은 그 문제를 해결할 만한 힘도 능력도 없는 자이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하실 수 있으시며 그렇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욥이나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이 고상한 확신을 말해줄 수 있는 자가 인생 중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욥기 저자의 의도가 신정론을 다루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욥에게서 성취되었다(창 3:15). 에덴동산에서 벌인 사단과의 우주적인 전투는 욥의 생애 가운데서 다시 한번 재현된 것이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승리를 쟁취하게 하신 것이다.
욥기에서 하나님은 사단의 위에 있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있다. 이것은 어느날 사단은 전적으로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진리를 미리 맛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16:20, 벧전5:9-10). 메르디스 클라인(Merdith Kline)교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신정론 문제를 매개로 욥기는 언약의 요구를 새롭게 들리게 한다. 그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절대주권적인 여호와에게 온전히 거룩한 자로 나타나도록 청하는 것이다. 언약의 이 길은,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거룩함, 불가사이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언약의 길은 지혜의 길과 일치한다. 그 길로 말미암아 이세상의 지혜학교 앞에 구속적 계시를 적절하게 증거하는 교회를 밝히는 것이다. “
그와 같은 복종은 칼빈에게 있어서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무슨 영문인지 묻지도 않고 하나님의 단 주권적 뜻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질지라도 또 전적으로 우리의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는 정반대의 것일지라도 단순히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은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천사들의 지혜보다도 더 나은 온전한 지혜이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를 숙이며 ‘주님 비록 주님의 판단이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깊은 골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들을 해결하려고 함부로 추측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칼빈의 문장(紋章)(Calvin’s coat of arms)의 그림은 심장을 붙들고 있는 손이며 그 둘레에 ‘여호와여 내 심령을 주님께 신속히 그리고 신실하게 드리나이다'(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라는 글이 쓰여 있다. 욥처럼 칼빈도 우리의 생명을 겸손히 그리고 복종적으로 하나님께 드릴 때 가장 고상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임을 알았다. 어떠한 고통이 우리에게 닥쳐오든지 그 고통을 극복하게 만드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주님에게 우리 자신을 복종하는 삶이야 말로 가장 행복한 인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