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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회사

한국 기독교 교회사 요약

1784년 이승훈이 영세를 받으면서 한국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는데 한국 교회사를 천주교 역사를 포함하여 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개신교는 정확하게 100년이 늦은 1884년 토마스 알렌이 입국하면서 시작되었다.

1. 서양 문화, 종교와의 접촉(   – 1866)

   그럼 1784년 이전의 서양 종교와의 접촉은 어떠하였는가? 고대 한국의 서양 문화와 종교의 접촉은 크게 3가지로 불 수 있다. 첫째는 중국의 당과 원나라를 통한 경교와의 접촉 가능성이고 둘째는 통일 신라 시대 아랍 세계와의 접촉 가능성이다. 셋째는 몽고를 통한 카토릭과의 접촉 가능성이다. 조금 더 설명을 한다면 이렇다.

   1) 중국에 소개된 경교가 한국까지 전달되었다. 경교(네스토리우스교) 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 시릴이 말하는 “데오토코스”가 부당하다고 하고 “크리스토토크스:”라 불러야 한다고 했다. 이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그의 사상 포함된 것인데 이언 신/인성 구분 때문에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던 종교이다.
   2) 한국이 최초로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820-912)의 제왕국지에서이다. 당시 아랍은 거대한 민족을 형성하여 중국과 접촉을 했고 한국은 이들 상인들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박용규 교수는 이미 9세기에 아랍의 학자가 한국에 대하여 “중국의 동쪽 산동성이 나오고 신라라는 표현이 나오고 금이 풍부한 곳이다”라고 소개를 했다.
   3) 1225년 경 불란서 루이 9세가 이슬람의 동진을 막기위하여 원나라 현종에게 파종된 카토릭 신부 루브루크가 자신의 여행기에서 “성의 정부 까우레”라고 한마디 언급한 것이 유럽에 알려진 최초의 소개로 알려지고 있다.
   4) 16세기 후반 유럽에서 종교개혁으로 심각한 종교 갈등을 겪고 있는 동안 한국에서는 1592년 임진왜란, 1627년과 1653년에 표류로 인한 박연과 하멜의 입국, 1816년 머리 멕스웰 대령과 바실 홀 대령의 서해안 비인면 탐사가 대표적인 기독교 관련 사건이 있었다.
   한국이 최초로 천주교와 접촉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당시 왜군의 상당한 숫자가 예수회 신자였다. 장성 중에도 있었다. 고니시 유키니카(소서행장)이 바로 그였다. 소서행장은 일본에 와있던 선교사를 초빙하여 일본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했고 한국에서 포로로 끌려간 이들이 5만명이나 되는데 이중 7천명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가사키에 포로로 된 자 300명이 대다수가 예수회 신자가 된 예도 있다.
   1627년 경주 앞바다에서 화란 사람이 배가 난파되면서 한국정부에 압송되었다. 이중 한명이 벨트그레(박 연)이었다. 그는 배와 포를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박연은 한국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1653년 제주도에 하멜 일행이 표착하게 되었고 13년 동안 한국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중 15명이 화란으로 돌아 가 화멜 표류기를 적었다. 이 책이 한국에 대한 선교 열기를 더하기도 했다. 
   1816년 영국 해군 대령 멕스웰과 바실 홀이 서해안을 항해하고 돌아가 조선 항해기를 저술하여 서양 세계에 조선을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 책으로 칼 귀츨라프 선교사가 동방과 한국 선교의 꿈을 꾸었다.
   5) 1582년 중국에 도착해 북경에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28년 동안 중국 선교를 한 마태오 리치가 이벽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이승훈을 시켜서 서학(천주교)를 연구하도록 하고 이때 이승훈은 세례를 받았다. 그후 장약전, 정약용이 믿게 되고 사제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2. 한국 선교의 준비 (1866 – 1884)

   1866년 제네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소실된 후 한국의 조정에서는 개항 절대 반대의 위정척사파, 중국식 개항을 지지하는 동도서기파, 완전 개방을 주장하는 개화파의 세 방향으로 의사가 갈라지고 있었다.
   중국은 스코틀랜드 출신들이 만주에서 활동을 했는데 그 중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있었다. 로스의 아내는 아내가 출산 도중 세상을 떠나고 그의 동생 캐더린 로스(당시 처녀)가 급히 선교지로 달려와 태어난 지 3일 된 아이를 헌신적으로 돌본다. 멕킨타이어는 그런 그녀(캐더린 로스)에게 청혼하여 부부가 되고 이들이 한국 선교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이 때 한약 중개상인 이응찬이 존 로스의 어학 선생이 되어 1년 간 신실하게 한 결과 고려문으로 가서 김성하 김진기 백홍준과 함께 한문 성경 번역을 시작한다. 나중에 이들이 회심하여 세례를 받고 여기에 서상륜이 합세하여1887년 신약성경이 완전 번역되었다. 이렇게 나온 성경을 들고 북부지역과 만주에 복음이 퍼지고 이어 이북 지역에도 복음이 퍼지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하여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는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가 농업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여기서 율전 박사의 인격에 매료되어 종교를 가지게 되고 세례를 받은 후 한 모임에서 대표기도도 했다. 그의 기도 편지가 선교 잡지에 실리고 이 편지를 읽은 언더우드와 아팬젤러가 한국으로 오게 된다.

3. 복음의 수용과 확장(1884-1900)

   1) 한국 국내에서의 복음의 확장 ; 김창성은 존 로스와 멕킨타이어가 인쇄기를 도입하여 출간하게 되는데 그는 한국어를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식자공으로 활용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고향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서상륜은 홍삼 장수였는데 만주에 장사를 하러 갔다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입원하고 보니 존 로스와 멕켄타이어가 관할하는 병원이어서 정성스러운 진료로 질병이 낫게 되고 이로 인해 존 로스의 선경번역에 큰 공을 세운다. 이 성경으로 서상륜은 고향으로 내려가 동생 서경조에게 예수를 전하였다. 서경조는 이후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고 이 학교 졸업 최초의 목회자 7인 중 한명이 되었다.

   2) 선교사들의 입국 ; 당시 선교사들의 입국을 도운 2가지의 큰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조미수호조약이고 또 하나는 갑신정변이었다.
   ① 조미수호조약과 보빙사 : 1882년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몇해전 일본의 입김으로 강화도조약이 맺어졌는데 이 세력이 너무 커져 이를 막기위하여 체결되었다. 당시 초대 대사 푸트의 요구로 조정은 11명의 사절단을 보빙사라는 명목으로 파견하게 된다. 당시 민영익이 대표로 갔으며 센프란시스코에서 바우처를 만나게 되었다. 이는 보빙사의 말을 들은 후 한국 선교에 꿈을 꾸었고 마침내 한국에 오게 된다. 고종을 만난 후 한국 선교의 중요한 기틀을 만들어 놓았다.
   ② 갑신정변 : 개화파가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우정국 낙성식에 불을 지르고 민영익을 칼로 난자를 한다. 이를 뮐렌도르프가 발견하여 알렌의 집으로 인도하였는데 그(알렌)는  민영익을 완치시켜주었다. 민영익이 청나라로 망명하니 수구파가 힘을 잃고 개화파가 득세를 하여 감신정변이 실패를 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의 집이 알렌에게 내려져 병원(광혜원)으로 개조되었다. 

   3) 이들의 선교 활동
   ① 당시 한국에 들어온 외국 선교회와 년도
감리교 – 미 감리회    1885
         남 감리회    1896
장로교 – PCUSA      1884
         VICTORIA(호주)   1889
         PCUS       1892
         CANADA    1899
침례교                1889
성결교                1907
구세군                1908

   ② 이들 선교사들의 특징은 1884년에서 1905년까지 다양한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송해주었다. 그리고 장로교와 감리교가 한국 선교를 주도하였고 당시 우수한 선교사들이 입국을 하여 주었다.
   ③  이들의 선교 정책은 다음과 같았다.
첫 째, 의료및 교육 선교 : 당시 의료선교의 기수가 광혜원이었다. 1885, 4, 10 개원하였다. 그리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라에 의하여 교육 선교가 활발하게 시작하였고 연희 전문학교 배제학당, 이화학당이 개설되었고 이들은 민족의 등불이 되었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둘째, 문서및 성경번역 : 1906년 신약성경이 번역되었고 1907년 구약성경이 번역되었고 1938년 개역성경이 나왔다. 셋째, 선교지를 분할하여 담당하였다. 넷째, 네비우스 선교정책 : 성경중심의 선교를 펼쳤다. 다섯째, 교파가 연합하여 선교를 하였다.

4. 평양 대 부흥 운동(1900-1910)

   1876년 강제적으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 1886년까지 한국은 수많은 강대국들에게 문호를 열어야 했고 그와 더불어 1894년 청일전쟁, 1895년 명성왕후의 시해사건,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보호조약, 그리고 1910년은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적 수난을 당해야 했다.

   1901년부터 1910년까지 특징을 지운다면 그것은 부흥이다. 이 부흥운동은 한국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 부흥 운동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1903년 웨일즈 부흥운동이 있었고 2년 뒤에 인도의 부흥운동 이후 호주에 부흥의 물결이 일어났다. 한편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생각한다면 러시아가 남하의 기지로 생각하고 일본은 대륙의 진출 기지로 미국은 아시아의 발판 기지로 청나라는 기득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을 나봇의 포도원으로 평가한 것은 아주 정당하다. 1897년 네비우스 선교 운동이 일어난 후 전국에서는 사경회 운동이 일어났다. 사경회는 말씀을 깊이 연구하면서 말씀과의 진정한 만나는 것으로 당시 한국 교회는 3개의 부흥의 파장이 있었다. 1903년 원산 대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10년 백만인 구령운동이다.
   1903년부터 1907년까지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던 부흥 운동은 영적 부흥 운동이었고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정치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인한 회개운동이었다. 

5. 민족주의와 기독교(1910-1930)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하여 조선을 접수한 일본은 최대의 적을 기독교로 점찍고 기독교 말살정책을 편다. 1911년 12월 29일 105인 사건이 터졌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일제의 한국 지배를 환영한다고 하며 신천에서 일어났는데 당시 일제는 거짓 선동을 통하여 선교사들을 내쫓고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하였다.  이 105인 사건을 통하여 선교사들은 일본에 등을 완전히 돌리고 한국인들에게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1919, 3, 1일 삼일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 운동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한국인들을 도와주었다. 외형적으로는 이 운동이 실패하였지만 한국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소망이 강했다는 것과 한국의 반만년 역사 속에서 신분 직업 연령 성별을 초월하여 민족공동체를 세계 앞에 내놓은 사건이었다. 이 운동이후 기독교가 성장했다.
   1923. 9.1일 일본 관동 지역에서 아침 11시 58분 지진이 일어났는데 인구 63만호에서 40만호의 집이 전소되었다. 오후 1시부터 괴소문이 돌았다.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방화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날부터 조선인들이 참혹하게 살해당하였다. 일본은 이후 소위 문화통치라는 명목으로 공창제도를 만들어 젊은이들을 성적으로 타락하게 만들고 아편 재배를 하게 하고 술을 권장하는 식민정책을 썼다.

6. 자유주의의 발흥과 보수주의의 응전(1930-1935)

   1930년대 세계적으로 장로교 감리교의 최대 이슈가 자유주의의 발흥이었다. 당시 3,1운동 이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지로 바꾸고 내선일체를 내세워 사범학교를 육성하여 엘리트 교사를 채용하여 이들로 하여금 일본을 존중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 유학을 장려하여 일본에서 배우게 하여 이를 조선에 이식하려고 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신학이 5가지가 발흥하였다. 즉 박형룡의 보수주의, 김재준의 자유주의 장경옥의 자유주의, 이용도의 신비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등이었다.

   조선 내의 자유주의 신학이 어떤 경로로 침투했는가? 다섯 가지 경로가 있었다. 첫째 윌리암 커를 중심으로  유니온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로 구성된 소수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고 둘째, 1920년대부터 감리교 신학이 바뀌기 시작했다. 개인구원에서 사회구원으로 교회목회에서 기관목회로 바뀌었다. 셋째, 학교 교육에서 창조론을 부인하고 진화론을 가르치며 이런 움직임이 확산되었고 넷째, 캐나다 연합교회를 통하여 회중교회와 감리교회 출신들잉 한국에 들어와 자유주의를 확신하기 시작했다. 윌리암 스코트 선교사가 대표적이다. 다섯째, 일본에서 교육받은 3인 즉 김재준, 송창근, 최필근이다. 이들은 청산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대리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신학지남 편집장이던 남궁혁이 자유주의 신학에 불을 붙였다.
   박형룡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였고 총회는 이의 심각성을 느끼고 표준 성경주석 출판을 추진하고 이에 앞장선 사람이 길선주 목사이다.

7. 1930년대 한국의 신학

   ① 김재준의 생애와 신학 : 장공 김재준은 1901년 함북 경흥에서 출생했고 독실한 유교가정에서 태어났다. 1926년 김익두 목사의 숭동교회 집회 시 회심하고 주를 만났다. 1925년 일본 청산학원에 유학을 하고 미국의 프리스턴으로 유학을 하고 웨스트 신학교로 옮겨 공부하였다. 1936-9년에 신학지남 사건 때는 중국으로 옮겨 교사를 하면서 강원용과 문익환을 만났다. 김재준의 신학은 실존주의적 해석, 초자연과 자연의 구분이 없고 그리스도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높다고 해석을 하는데 이는 바르트 사상의 핵심이다. 1960년 이후는 함석헌과 함께 어울리면서 민주주의의 투사 민족주의 지도자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는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했다.
   ② 정경옥의 생애와 신학 : 그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으나 1928년 미국으로 유학을 했고 프랭클린 놀 교수로부터 자유주의 신학에 심취했다. 그는 슐라이애루마허와 리출의 신학에 영향을 받았다. 1931년 귀국하여 협성신학교 교수를 하고 1943년부터 2년간 광주 중앙교회 담임목회를 하다가 42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신학은 오늘날의 감리교의 신학과 다르다. 그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 자유주의 해석을 말했다. 그리고 종교다원주의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했다,
   ③ 박형룡의 생애와 신학 : 죽산 박형룡은 1923-6년 유학기간중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논쟁을 직접 목도했다. 박형룡은 한국에서도 멀지 않아 이런 일이 있을 것으로 예상을 하고 전투적 메이천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프린스턴의 신학으로 정통주의와 자유주의를 논했다. 
그의 신학은 성경무오 성경의 완전축자유기적 영감이었다. 그는 정통주의 신학을 보존했고 성경의 권위에 대한 사상을 뿌리내렸다. 

8. 신사참배 반대 운동(1935-1945)

   1936년 1월 18일 조지 멕퀸은 조선 총독에게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편지를 하고 4개월 이후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신사참배 반대는 1935년부터 10년 간 가장 큰 시련이었다. 1919년의 3.1운동보다 더 큰 문제라고도 했다. 
   신사가 왜 문제가 되는가? 신사는 일본의 가미 사상에서 유래하는데 모든 것이 다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전쟁영웅을 가장 높이 숭배했고 이것이 천황숭배 나아가 패권주의로 이어져 천황은 태양신의 아들이기에 계속 전쟁에서 승리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명치유신의 이데올로기로 등장한다. 
   이 논쟁으로 미국 선교부에서 선교사들의 회의 결과 한국에 있는 학교를 폐교할지언정 신사참배와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1936년 로마 교황청은 신사참배를 허용하였다. 이는 교황청이 독일 이탈리아 일본 이 3국 하고만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이 세 나라는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1937년 2월 가장 큰 노회인 평북노회에서 신사 참배를 가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한 사람들은 평양신학교 학생들, 박관준 장로, 주기철 목사이 세 구룹이었다.

9. 대립과 분열의 시대(1945-1960)

   이 시대는 대립과 분열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간하배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대립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세 차례의 장로교의 분열이 있었다. 이 분열의 역사적 배경에는 1940년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는데 평양신학교와 단절, 세계 신학 조류의 수용, 성경 무오성의 반대를 주장하였다. 이를 비판한 그룹이 고려신학교였다. 고려신학교는 1946년 출옥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다. 
   이 때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던 51명의 학생들이 반감을 갖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들은 조선신학교의 교육이념을 수긍할 수 없다고 하며 근대주의 신학과 고등비평을 배척하고 순복음의 전사가 되어 세계를 향하여 도전하겠다고 주장했다. 즉 김재준의 신학을 거부하고 박형룡의 신학에 기울었다.

   그럼 세 차례의 장로교의 분열을 살펴보면 첫째, 1952년 기장이 분열되었다. 51인의 진정 사건 이후 1951년 총회에서 김재준과 스콧 선교사를 면직하니 이에 반감을 가진 700개 교회가 떨어져 나가 기장을 창립하였다. 둘째, 1952년 고려파의 분열이다. 고려신학교의 교장이던 박형룡 박사가 신사참배한 총회의 인준 문제, 보수적 선교사들의 지지화 협력 문제, 부산에 있는 신학교를 서울로 옮겨갈 것등 이 3가지 문제로 고신의 한상동과 대립을 한 결과 박형룡은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다. 1948년 총회신학교가 설립되었고 박형룡이 초대 교장이 되었다. 결국 1949년 한국의 장로교 안에 세 파벌이 존재했는데 조신 – 기장, 고신 – 고려파, 총신이라는 그룹이 각자의 역할을 하였다. 셋째,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이었다. 이 원인은 WCC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여 1959년 호남지역 10개 노회가 WCC를 정식으로 탈퇴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고 여기서 통합과 합동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선교사들9북장로교, 남장로교)과 대학교들이 통합측으로 넘어가고 아무 것도 없던 합동측 교단은 성경의 무오성 하나로 이렇게 큰 교단을 형성하였다.

10. 졍체성 파악의 시대(1960-    )

   한국 교회에서는 4.19와 5.16으로 큰 변화를  탄생시켰다. 
   ① 토착화 운동 ; 운동의 중심에는 연세대 신과 대학, 감리교 신학대학, 한국 신학대학이 있었다.  연대는 민족이라는 모티브로 감신의 경우는 문화를 한신은 민중이라는 모티브를 갖고 토착화 신학을 전개하였다. 1960년대는 유동식 교수와 윤성범 교수의 환웅, 환인, 환검의 삼위일체론을 폈고 1970년대는 윤성범이 성(誠)의 신학을 제기하면서 율곡과 충무공의 삶이 기독교의 계시와 다르지 않다는 이론을 제기하였다. 1980년대는 민중신학이 등장하는데 안병무교수와 서남동 교수로 구분되었다. 다른 흐름은 해방신학과 과정신학으로 구분되고 다른 하나의 흐름은 종교다원주의 이다. 
   ② 복음주의 운동 ; 1960년 이후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온 신진 학자들의 등장이다. 이들이 KETS(한국 복음주의 신학회)를 조직하게 되는데 총신의 김의환, 서울신대의 조중남, 장신의 한철하 고신의 오병세 교수가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과 대립하여 KETF(한국 복음주의 협의회)가 등장하고 한편 초교파 선교 단체들(CCC)도 힘을 합치게 된다. 다른 흐름은 출판사들의 등장이다. 생명의 말씀사 엠마오 두란노 서원등이 해외 복음주의 책들을 번역하여 소개하게 된다. 다음은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성격의 교회 설립이다. 여기에는 사랑의 교회(옥한흠), 온누리 교회(하용조), 남서울 교회(홍정길), 지구촌 교회(이동원) 등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서울 광염 교회(조현삼), 분당 우리 교회(이찬수), 열린교회(김남준)가 이 흐름을 추가하여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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