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 해석” 세미나가 열렸다. 만약 주최가 불분명하고 기성교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열렸으면 이런 종류의 세미나에 참가하지 말아야 한다. 이단들이 비유해석을 통해 기성교회 교인들을 미혹하기 때문이다.
동부개혁장로회신학교(학장 김성국 목사)가 주최하고 뉴욕교협(회장 정순원 목사)이 주관한 세미나는 3월 26일(화) 오전 10시 퀸즈장로교회에서 열렸다. 강사 이국진 목사는 필라에서 목회를 하다 지금은 전주 예수비전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세미나는 인도 허윤준 목사(학감), 강사소개 김성국 목사(학장), 시작기도 이은수 목사(교협 총무), 세미나, 오찬기도 이창종 목사(교협 서기)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국진 목사는 교수가 아니라 목회자답게 마치 설교를 하듯이 열정적으로 세미나를 인도했다. “예수님의 비유”의 전반에 대한 소개에 이어 직접 예수님이 하신 비유를 풀이했다. 다음은 세미나 내용이며, 4개의 비유 풀이는 음성파일로 제공한다.
예수님의 비유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대해 고민해 보려한다. 비유는 목회자들은 설교를 많이 해 왔기에 일가견들이 있을 것이다. 비유는 이 시대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유는 이단들이 비유를 가지고 장난을 많이 친다. 특히 한국교계를 흔드는 신천지 이단 집단이 비유풀이를 통해 많은 젊은이들을 미혹한다. 기성교회에서 찾기 힘든 젊은이들이 이단집단에 많이 가서 열광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신천지 집단에서 비유풀이를 통해 젊은이들의 마음을 잡는다.
비유는 스토리, 스토리의 파워
사실 비유는 스토리(이야기)인데 스토리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명제를 이야기하면 그냥 귀로 흘러 버린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신앙생활을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명제들을 이야기하면 마음속에 잔상이 남지 않고 그냥 흘러간다. 하지만 스토리로 이야기하면 달라진다. 스토리를 이야기 하면 사람들 마음속에 와 닿고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는다. 성경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요약한다면 몇 마디로 요약될만한 내용들이 사실 성경 속에 들어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우리들에게 주실 때 몇 가지 문장으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66권이라는 방대한 이야기책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계신데 그렇게 하신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토리는 큰 파워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요셉의 이야기를 보자. 요셉이라는 청년이 노예로 팔려가고 노예생활을 하는 가운데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는데 결국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하셔서 애굽의 총리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구원하게 하시고 역전의 인생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줄 때 그 이야기는 잊혀지지 아니하고 언제나 우리들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이 살아가다 요셉과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요셉의 이야기를 떠 올리면서 힘을 얻는다. 지금 내가 아무런 잘못을 한 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나를 모함하고 힘들게 만들면서 비참하고 억울한 상황속에서 요셉이야기가 떠올린다. 그래서 요셉도 억울하고 힘든 상황가운데 결국 하나님이 그를 건져주시고 총리를 삼았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살아 움직이면서 힘과 용기를 얻는 놀라운 파워를 가진 것이 스토리의 힘이다.
그래서 요즘 설교학에서는 스토리의 파워를 인정하는 분위기로 흐른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스토리로 가르치라고 한다. 부교역자를 채용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하면 항상 소요리 문답을 가르친다. 신학교에서 배웠고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배웠기에 소요리 문답부터 가르친다. 안타깝게 아이들이 소요리 문답을 배우면서 삶의 변화가 있지 못하다. 그냥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하는 것 같다가 청년 때가 되면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참 많이 있다. 명제를 가르친 것들이 그들의 마음가운데 거의 남아있지 않는다. 그런데 스토리로 가르치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다윗이라는 연약하고 미약했던 청년이 객관적으로 골리앗을 무찌를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물맷돌을 던져 골리앗이 쓰러뜨렸다는 통쾌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아이들이 자신의 어려운 상황가운데 좌절하지 아니하고 골리앗처럼 칼도 방패도 갑옷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면 골리앗과 같은 상황을 내가 반드시 물리쳐 이길 수 있겠다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파워풀한 능력이 스토리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소요리 문답을 가르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요리 문답을 스토리로 이야기로 해서 전달하게 될 때 아이들의 마음가운데 깊은 잔상이 남는다는 것이다.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비유라는 것은 논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스토리이다. 이 스토리를 던져놓고 한번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면 한곳으로 몰아갈 수 있는 파워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천지에서 비유풀이를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으로 보면 하나도 맞지 않는다. 신천지에 가서 그들의 강의를 들어보고 그들이 어떻게 비유를 풀이했는지를 들어보면 엉망진창의 해석을 한다. 하지만 그 엉망진창인 해석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해서 그것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이를 고민하려고 한다.
성경에서 같은 단어라도 다른 의미가 가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성경에서 같은 단어이지만 단어의 의미가 본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스펠링이 같다고 해서 같은 단어라고 생각해서 사용하면 안된다. 신천지에서 사용하는 비유해석법이 바로 이런 해석법이다. 같은 단어가 나오면 연결을 시킨다. 그래서 ‘씨’가 나오면 천편일률적으로 말씀으로로 해석한다.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사자’가 나오면 마귀로 해석하는 등 모든 단어를 천편일률적으로 해석하는데 신천지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신천지의 문제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하면 안타깝게도 기성교회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기성교회에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해석법을 많이 사용한다. 성경은 아무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는 다 짝이 있으나 성경에 나오는 이 말 저 말을 연결시키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면 잘못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같은 단어라도 의미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 비유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볼 때마다 이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단어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으면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비유를 많이 사용하신 이유
예수님은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다. 마가복음 4:33-34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표현할 정도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다. 물론 비유가 아닌 말씀도 하셨지만 과장법을 사용해서 비유가 아니면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고 할 정도로 예수님은 비유를 많이 말씀하셨다. 그렇게 비유로 말씀한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주제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비유는 설명하고 싶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를 말하고 싶은데 A를 말하지 않고 B를 말하는 방식을 비유라고 한다. A를 설명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니 그것을 설명하기위해 B를 비유로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 어떤 청년이 교회에 왔기에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교역자에게 그 청년에 대해 물으니 교역자가 말하기를 장동건 처럼 생겼다고 했다. 그러면 제가 청년을 보지 않았지만 어렴풋하게 이해가 가능하다. 비유가 이런 장점이 있다. 내가 전혀 보지 못한 것, 전혀 알지 못한 것을 설명할 때 그 것과 가장 비슷해 보이는 다른 대치물을 가지고 설명해주면 그것을 보지 않았음에도 알고 있는 것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많이 사용하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설명하시고자 하는 주제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것들은 하늘의 것, 영적인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하늘의 것, 영적인 것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 없다. 인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을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촉감으로 느끼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인지한다. 하지만 영적인 것은 우리들의 육감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아주 어려운 주제를 설명하기위해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설명하신 것이다. 하늘의 것을 땅의 것을 가지고 설명해주면 그때 비로소 우리들이 땅의 것을 알기에 영적인 것이 어떠한 것인지 어렴풋하게 이해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할 때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렇다.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설명할 방법이 없기에 세상의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설명한다. 아버지는 자녀를 너무나 사랑해서 자녀를 위해서라면 다 해줄 수 있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다. 아버지라는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아버지 같으시다고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구나, 우리를 품으시는 분이구나를 알 수 있다. 또 아버지가 무엇을 제공해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들에게 뭔가를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예수님이 비유를 많이 말씀하시는 필연성은 영적인 주제는 우리가 알 수 없기에 땅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알 수 있기에 비유로 하신 것이다. 그래서 비유는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의 단점과 한계
그런데 비유는 단점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비유라고 할지라도 비유 자체는 실체에 비해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 설명해도 아무리 땅의 것으로 설명한다 하더라도 땅의 것은 땅의 것이지 영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비유가 아무리 뛰어나도 실체를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예를 들이 외계인들이 지구를 구경하고 자기 별로 돌아가서 지구에 사는 생물을 보고할 때 인간을 그 별에 사는 원숭이처럼 생겼다고 보고한다. 그러면 인간을 한 번도 보지 않았어도 원숭이라는 비유를 통해 어렴풋하게 이해는 가능하지만 아무리 좋은 비유라 할지로 인간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인간과 원숭이와의 다른 차이점 때문에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비유의 첫째 단점은 아무리 뛰어난 비유라고 할지라도 영적인 실체를 그대로 정확하게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단점은 비유는 하늘의 이야기를 오해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여러가지로 비유하는데 시편 23편을 보면 ‘목자’라는 비유로 설명한다. 하나님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비유이다. 중동지역의 목자들은 정말로 양을 사랑을 다해 돌보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을 목자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목자가 양을 잡아먹는다. 양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한다. 그렇다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비유를 들으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하시고 모든 것을 다 취하고 우리를 결국 죽여서 자신의 배를 채우시는 분이라고 오해하게 만들 가능성이 비유 안에는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비유의 위험성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아니하면 성경에 있는 비유들을 오해하게 된다. 종종 목사들 가운데 성도를 양이라고 하면서 젖도 짜먹어야 한다고 농담으로 말하는 분도 있는데 사실은 그것은 비유를 오해한 결과이다. 그래서 오늘 비유 해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비유는 ‘비교점’도 있고 ‘대조점’도 있다는 것이다.
비유의 비교점과 대조점
영적인 실체 A를 나타내려고 세상의 B를 사용해서 나타낸다. 두 단어 사이에 연관성 때문에 비유는 사용하기는 하지만 사실 B의 일부분의 내용이 영적인 A의 실체 부분과 일치하기에 비유가 성립하는 것이다. ‘목자’라고 하는 비유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비유로서 사용될 수 있는 그것은 목자의 특성중에 양을 위해 사랑도 베풀고 돌보고 먹이는 모습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고 먹이시는 그 부분과 일치하기에 비유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것을 ‘비교점’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목자는 이런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궁하면 양을 팔고, 고기가 먹고 싶으면 양을 죽여 고기를 먹으며, 털을 깎아 팔기도 한다. 그런 요소들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요소가 되지 않는다. 이런 부분을 ‘대조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비유에 있어서 과연 이 비유는 영적인 실체의 어떤 점을 나타내기 위해 어떤 ‘비교점’을 가지고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비유에 있는 여러 속성가운데 어떤 것들은 영적인 실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대조점’이 있는가를 분석해서 비유를 해석하고, 비유해석만이 아니라 성경전체 해석에서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를 분석하는가가 성경을 해석하는데 큰 과제가 된다.
비유 해석의 원리
비교점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원칙 중에 하나는 콘텍스트가 왕이라는 원리이다. 비유가 사용된 문맥으로 비유의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8장 가난한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보면 예수님은 그 비유를 해주신 목적은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비유를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러니 비유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비교점이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그 비유를 해석해야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면 잘못된 해석이 될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안의 비유는 어떤 맥락에서 주어진 것인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를 질문했다. 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안 비유로 대답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밝혀주는 비유로 해석해야 제대로 맞는 해석이 된다. 문맥에 맞는 해석을 해야 하는데 종종 교회역사를 살펴보면 문맥과는 전혀 관계없이 해석하면서 엉뚱한 결론을 내린 적이 너무나 많다. 문맥에 따라 우리가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예전에 읽은 책 중 하나를 보면 가난한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과부는 기도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재판장을 찾아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항의하고 또 항의해서 결국 자신의 기도의 제목을 얻어낸 것처럼 우리도 기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해석한 것을 보았다. 그럴듯한 해석이기는 하지만 성경적인 문맥에서는 맞지 않는다. 성경적인 문맥에서 예수님이 비유를 하신 이유는 낙심하지 말라는 관점에서 해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비유를 해석해야 한다.
둘째 원리는 성경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비유를 해석해야 하고, 문장을 해석하고 단어들을 해석해야 한다. 성경전체의 가르침이 비추어 보지 않고 한 문장에 따라 해석하다보면 이단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밤중에 이웃에 떡을 빌리러 가는 사람의 비유가 등장한다.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어서 밤중에 이웃집 문을 두들기면서 떡을 달라고 요구하지만 잠자리에 누었는데 일어나 줄 수 없다고 한다. 이웃집 사람은 누구를 나타내는 것인가? 하나님을 나타낸다. 이웃집 사람이 떡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웃집 사람을 닮았다.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은 누구를 비유한 것인가? 우리를 비유한 것이다. 성경에서 그 사람이 떡이 없어서 이웃집에 가야하는 상황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부족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상황이 있다고 하는 점에서 우리들은 떡을 빌리러 가는 사람과 닮아있다. 그래서 떡을 빌리러 이웃에 가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 간구한다. 그러므로 이웃집 사람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떡을 빌리러 가는 사람은 우리들을 나타내고, 떡을 빌리러 가는 것은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이웃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비교점이 있기에 비유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웃집 사람이 떡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시다는 점에서 비교점이 있다. 그런데 성경에 이웃집 사람이 밤중에 잠을 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무시고 조실 때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것은 비교점이 아니라 대조점이다. 어떻게 대조점인지 알 수 있는가? 성경 전체 가르침에 비추어 보았을 때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비유를 해석해나갈 때 비교점이 아니라 대조점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더 나아가 성경에 나오는 단어는 같은 단어이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될 때가 너무나 많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엉뚱한 성경해석이 된다. 어린아이는 좋은 의미인가 나쁜 의미인가? 좋은 의미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좋은 의미만 있는가?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다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 11)”라는 말씀도 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 대해서 장성한 사람이 되지못하고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책망도 했다. 어린아이는 문맥에 따라서 긍정적인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러니 같은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의미가 100% 다르다. 의미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이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단어를 서로 연결시키면 잘못된 해석이 나온다.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천국간다고 했으니 성경도 깨닫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추하게 하는 사람이 천국에 간다고 결론을 내리면 안되는 것이다. 같은 단어이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사자’도 마찬가지이다. 사자는 한편으로 “하나님은 사자와 같은 분이시다”라며 하나님을 나타내는 비유로 사용된다. 하지만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며 마귀를 나타내는 비유로 사용되기도 했다. 문맥에 따라 사자가 하나님을 나타낼 수도 마귀를 나타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계명성도 타락한 천사를 나타낸다. 이사야서를 보면 타락한 천사를 계명성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계명성이 예수님을 나타내기도 한다. 요한계시록 22:16을 보면 ‘새벽별’ 계명성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니 계명성은 예수님이 되기로 하고 때로는 사탄을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하다. 카톨릭에서는 예수님을 계명성으로 노래하는 찬송가가 있다. 계명성은 라틴어로 루시퍼이다. 우리는 루시퍼 하면 사탄의 이름으로 아는데 사실은 계명성의 라틴어이다. 카톨릭에는 루시퍼인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있다. 그것을 보고 카톨릭이 사탄을 찬양하는 종교라고 비판하는데 사탄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성 되신 예수님을 찬양하면서 우리의 빛 되신 하나님, 새벽별 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을 해석할 때 같은 단어라 할지라도 모든 단어를 천편일률적으로 같다고 생각해서 연결하면 엉뚱한 해석이 나온다. 신천지 해석이 그런 면에서 잘못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신천지가 해석하도록 방치한 것이 우리들이다. 우리들이 종종 설교하면서 성경에는 짝이 없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단어들을 연결하여 해석하다보니 엉뚱한 해석이 나온다.
엉뚱한 해석 중의 하나가 무화과나무 비유이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라고 하셨다. 이 비유를 해석하면서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것을 이스라엘 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1948년 독립했으니 이후 얼마 뒤 곧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고 해석한다. 1990년에 온다고 다미선교회 주장했으나 실패했고, 2012년에 오신다는 주장도 빗나갔다. 잘못된 해석의 원인은 무화과나무가 한번 이스라엘 민족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 적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무화과나무만 나오면 이스라엘로 해석하는 잘못된 비유해석의 결과이다. 사실 그 내용은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는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징조들이 나타나면 종말들이 가까운 줄 알라는 의미이지 이스라엘 독립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이어 이국진 목사는 비유들을 해석하는 예를 보여주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여 mp3를 다운로드 받거나 온라인에서 4가지 비유해석을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