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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은 상징 아닌 복음의 핵심이다

부활신앙은 상징 아닌 복음의 핵심이다

            실천의미 사라진 형식적 절기로 전락, 참된 소망의 신앙 상실 불러
            부활 증거는 그리스도인의 사명 … 온전한 증인으로 다시 서야

   김용준 목사

    I. 서론: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 십자가와 부활이 점점 사라져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십자가도 멀리하고 부활도 멀리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지적했던 한 노신학자의 지적은 한국교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부활신앙은 점점 복음으로부터 제외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한국교회가 그래도 십자가에 대해서는 외치지만, 부활에 대해서는 등한시하고 있다. 또한 성도들에게는 부활신앙이 단순히 부활절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박형룡 박사(험증학)는 초대교회 복음의 사역자들은 “복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관계를 나눌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사도행전 1장 12절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신앙은 상실의 시대로 묻혀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부활신앙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복음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II. 본론

   오늘날 부활신앙을 말하기 위해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학의 현주소와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상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현실을 전제로 필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부활신앙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현대신학에서의 부활의 의미와 현재 한국교회의 실천적 문제가 그것이다.

   1) 현대신학에서 부활의 의미

   현대에는 삼위일체 신학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신학을 전개해 나갈 수가 없다. 그러나 정통신학과는 다르게 삼위일체 신학이 현대 신학자들에게는 해석학적 기저로 남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의 이해는 기독론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난다.

   현대 신학자들은 기독론을 전통적인 방식인 ‘위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아래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방법론은 그들의 기독론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단순히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성스러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이다. 바르트(Karl Barth)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언제나 성육신한 로고스일(logos ensarkos) 뿐이며(그리고 유일 그리스도론-Christomonism), 몰트만, 융엘, 판넨베르크(Wolfhard Pannenberg)는 전통적인 기독론의 핵심인 두 본성교리와 선재설을 희랍철학의 영향으로 비판하면서 해체를 시도하였다. 그러면서 몰트만과 융엘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하나님이 이 그리스도를 자기와 동일화 시켰다고 하면서 이를 신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몰트만보다 더 강력하게 융엘은 하나님의 죽음에 대한 진술이 바로 기독교의 근본적인 전통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현대 신학자들에게서(신 죽음을 표면적으로 주장하든 그렇지 않든) 나타나는 문제는 기독론의 시작이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닌, ‘예수가 하나님이다.’는 진술이다(바르트, 융엘, 몰트만, 판넨베르크). 이는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와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의 동일화에 기초하는 만유재신론(Panentheism)의 영향이다. 즉 하나님을 인간(예수) 안으로 축소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신을 향한 앙양과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인간 삶의 모범으로서 기독론의 의미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 신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진술들은 결국 1)서철원 박사(기독론)가 지적하는 대로 죄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없고 2)변증법적인 십자가와 부활이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만을 내포하며(종말론적인 의미-몰트만과 판넨베르크) 3)보편구원론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론의 이해 속에서 현대 신학자들의 부활 이해는 단순히 해석학적 기저일 뿐이다. 현대신학에서 성경이 말하는 초자연적인 성육신은 없다. 성육신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도, 부활 사건도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다. 따라서 부활이라는 용어는 그들 신학의 해석학적 도구일 뿐이다. 부활 사건을 단순히 해석학적인 문재로 취급(실존적 이해)하다보니 ‘부활의 증인’으로서 선교의 사명이 ‘인간의 영혼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에 기초한 보편 구원론적 이해 안에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사회구원(missio dei)만의 의미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와 맥락을 같이하여 가시적 교회만 존재하는(한스 큉) 교회는 가시적 교회의 확장이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되는 것이다. 또한 현대 신학자들은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지 않으므로(몰트만, 판넨베르크) 교회가 모든 종교(사회)의 대화의 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이는 WCC의 근본적인 이해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근본신앙은 현대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보편적인 인간을 위해 희생한 한 인간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이신 성자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중보자의 역할을 완성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분명하게 십자가와 부활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며, 실재적이고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기독교 근본신앙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는 박형룡 박사(험증학)가 지적한 것처럼 1)속죄사역을 완성하시고, 2) 구속의 본질을 밝히 가르쳐주는 일대광명이며, 3) 신자의 부활을 확증하는 것이다.
 

   2) 한국교회의 실천적 문제

   현대신학에서 부활신앙은 형식적인 해석학적 전제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안타깝게도 교회에서조차 부활신앙이 상실되어가고 있고, 형식적인 절기만을 지킨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천적인 문제가 부활 신앙의 부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를 다루는 이곳에서는 이러한 부활 신앙의 부재에 따른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실천적 삶의 문제를 부활절(부활신앙)과 연결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a.부활절과 주일

   부활절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할 때, 형식적인 절기 즉 일 년 52주중 어느 한주에 국한되고 만다. 그것은 부활절이 단지 지나가는 명절로서 부활의 의미는 축소돼 버린다. 그러나 부활절은 그 한 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일(고전 16:2)이라는 말의 의미는 성경이 자주 언급한 것처럼 안식 후 첫날(눅 24:1; 막 16:2;요한복음 20:1; 마태복음 28:1;사도행전 20:7; 요한복음 20:19), 즉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고 모여 예배하였다. 이날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요,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된 날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부활절은 너무나도 쉽게 형식적인 절기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러한 형식적인 절기화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약화시키는 것이며, 결코 삶의 예배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다. 매 주일이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과 감사와 찬양의 날이 되어야 하며, 매일의 삶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감격하며 살아가야하는 삶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활신앙은 고사해 가고 있는 것이다. 단지 형식화된 부활절은 교회를 바르게 세울 수 없다. 논리만을 앞세운 현대적 신학세태와 물질과 편의주의 사고를 넘어 부활신앙을 회복시키는 것이 오늘날 우리 기독인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b.달걀과 부활절

   부활절 하면 으레 달걀을 생각한다. 물론 이 달걀에는 나름의 사연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상징이 우리의 신앙을 파괴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부활을 상징하려던 달걀이 부활대신 새로운 이미지로 그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로부터 시작해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부활절이 어떤 의미인지보다는 부활절에 먹는 달걀에 대한 향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절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달걀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오는 현실이 되었다. 이는 심각한 문제다. 이를 한국교회는 간과해서는 결코 안 된다. 지금부터라도 달걀이 아닌 부활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진리를 제시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이를 분명하게 세우지 않으면 부활절은 단순히 달걀 먹는 날이 되고 말 것이다.

   c.세상에 대한 갈망과 부활 소망의 상실

   이제 마지막으로 부활의 소망에 대한 상실의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다. 작금에는 흔히 말하는 ‘미국제 복음주의’(마이클 호튼: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에 대한 문제를 많이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는 민주주의의 시녀가 된 하나님, 실용주의적 복음주의, 소비자중심주의, 자기중심주의, 감정 중심의 신앙, 이교도로의 복귀 등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 형태들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신앙이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십자가와 부활신앙 대신에 세상으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부활신앙은 지금 현실에 대한 만족과 행복이 아니라, 장차 다가올 영광에 대한 신앙이며, 상속자로서 고난을 더불어 받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교회의 규모와 교인들의 숫자가 경건의 척도가 되어가는 곳에서는 참된 부활신앙이 자리 잡을 수 없다. 바빙크 말대로 비록 신앙인들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언제나 얼굴과 눈은 하늘을 향해야 한다. 지금 땅위에 서서 어디를 바라보는가가 중요한 시점이 되었다. 부활신앙의 상실은 지금 이 땅의 성도들로 하여금 땅만 바라보게 하는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제 깨어나서 비록 발은 땅에 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한다.
 

   III.결론

   부활신앙은 십자가 신앙과 함께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부활신앙이 단순히 해석학적인 기저나 어떤 상징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진다면 복음은 올바로 설수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말씀 위에 바르게 세운 신앙과 복음의 정수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부활의 신앙을 단순히 의미적으로만 받아들이거나, 간과하거나, 또는 부정하는 불신적인 태도가 아니라,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양하며, 감격하면서 부활의 증인들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여! 상실했던 부활의 신앙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가야할 곳은 이 세상의 논리나 이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사건을 분명한 믿음으로 수납하고 그 신앙고백 안에서 온전한 복음의 일꾼들로 다시 세워져야 한다. (2011.4.11.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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