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교회가 당면한 큰 문제는 종교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종교 다원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은 점점 더 단 하나의 객관적 진리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의 복음을 과연 유효하게 선언하고 선포된 복음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그들의 삶과 생활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이제까지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 혹은 교회 중심적 배타주의를 고수하며 신앙을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 모든 종교들이 자기 절대성과 궁극성을 주장하고 서로 상이한 입장들이 공존하게 되었다.
종교 다원주의란 종교 다원 현상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다원적인 종교들을 동일한 지평선에서 바라보며 다원적 종교들의 궁극적인 것 (the ultimate)의 실제를 주장하는 종교적, 신학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종교로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여러 가지 종교들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따라서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의 길이 있고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는 그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상대적이며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기본 명제를 전제로 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잘만 믿으면 천당도 가고, 극락도 가는데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다, 목적지는 같지만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는 얘기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여러 관점에서 볼 때 종교 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으며, 기독교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주장이다.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종교도 더는 자기 절대성, 혹은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의 기본 입장은 모든 종교들이 제시하는 진리에는 그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을 뿐 아니라 적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결코 특정 종교의 기준이 타종교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비교 종교학 교수였던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1916-1973)는 종교적 다원주의 문제는 교회가 따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던 선교 현장의 선교사들과 비교 종교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고 한다. 18, 19세기의 그리스도교 선교 정책은 서구 식민주의와 그 궤를 같이하는 제국주의적 선교 정책이었다. 즉 서구 열강들의 군대가 약소국을 점령하면 선교사가 뒤따라 들어가 그리스도교로 그 지역을 점령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서구 식민지 정책이 종식되고 독립국들이 점차 늘어가면서 그리스도교의 정복 선교 정책도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선교지 일부에서는 선교사들이 타종교와의 대화를 주장하며 타종교를 인정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는가 하면 ‘세계 복음화‘와 같은 그리스도교의 선교 기치는 침략적인 제국주의 정신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며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선교 형태를 반성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한편 니터에 의하면 신학적 종교 다원주의의 촉발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죤 힉 역시도 같은 입장에서 궁극에는 모든 종교가 한 형제라는 것을 깨닫고 종교들이 서로 협력하며 교류하는 하나의 이상세계가 올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미 그리스도교를 변화시키고 있는 에큐메니칼 정신은 세계 종교간의 관계에도 더욱 영향을 미칠 것이다.
뉴비긴(L. Newbegin)은 서구 사회에서 다원주의의 근원을 유럽의 계몽주의에 의해 부활한 합리주의 전통에서 찾고 있다. 그는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통에서 이성은 진리를 확인하고 방어하는 유일한 도구가 되었다. 다원주의적 관점은 또한 과학적 방법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과학적 방법론은 무엇인가? 인간의 감각에 의해 관찰 대상으로부터 사실들을 얻어내는데 있어서 이성을 수단으로 가정을 세우고 결론을 유출해 내고 계속되는 적용을 통해 그 결론들을 시험하고 검증한다는 것이다. 비서구 세계에서의 모든 이슬람 국가들이 압도적으로 반 다원주의적이고, 단일성이 모든 생활의 영역에 미치고 있으며 법적으로 강요되기도 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비신자들의 거주지를 정해 놓고 그들의 활동을 엄격히 통제한다. 아시아, 아프리카에 있는 비 이슬람 국가들은 수세기 동안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살아왔다. 인종과 문화가 뚜렷이 구분되는 공동체들이 서로 근접해 있는 상황에서 긴장은 있었지만 일정 기간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관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또한 종교적 다원성을 인정하게 되고 그것을 일부 수용하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특별히 종교적 진리는 오로지 인간의 영혼에 국한되었다. 진리는 영에 의해서만 이해되어진다. 역사는 종교적 진리와 경험을 구성하게 된다. 종교 의식과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는 모든 역사 종교들은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다원주의 정신은 힌두교가 지배적인 영향을 미쳐 온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다원주의는 서구든, 비서구든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관점인 상대주의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Alann Bloom 에 의하면 상대주의는 현대인의 도덕적인 조건이며 자유 민주 사회의 조건이라고 한다. 개방적인 사람을 상대주의에 헌신된 사람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절대주의(Absolutism)란 관용적이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현대 사회는 자신도 생존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도 함께 생존하게 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미덕이 되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종교 다원주의의 기원은 합리주의적 전통과 상대주의의 대두라고 말할 수 있겠다. 종교 다원주의론자들은 종교 다원화에 대한 정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특정 학자의 말을 인용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는 현 시대는 모든 종교가 다양하게 공존하는 종교 다양성의 시대이므로 어느 특정 종교가 절대적 진리나 가치를 주장할 수 없다는 종교에서의 가치 중립적 태도를 의미한다.
종교 다원주의의 신학적 기초는 현재의 제도적 교회가 신약의 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함으로 현재의 기독교를 부정하고 상대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종교 다원주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전오진 교수는 여섯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를 부정하고 상대화한다.
둘째는 일부 서구인들과 신학자들은 서구 식민주의와 양차대전에 대하여 강한 죄책감을 가지고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죄악시하고 비 서구 문화를 찬양한다.
셋째는 종교 다원주의는 비서구인들 특히 많은 아시아인들이 서구로 이주하거나 거주함으로 서구 사회를 종교 다원주의사회로 만들었다.
넷째로 비서구 국가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감을 전통 종교에서 추구하는데서 종교 다원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다섯째로 종교 다원주의 신학은 서구 신학이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절대성을 포기하는데 일차적 원인이 있다.
여섯째로 W.C.C의 종교 대화는 전도의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인류의 평화와 복지라는 세속적 목적과 다원주의로 발전되었다.
알랑 레이스는 그리스도교와 타종교의 관계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배타주의 (exclusivism),
포괄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가 그것이다.
배타주의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만이 참 종교요, 절대 종교라고 믿는 그리스도교 절대주의(christian absolutism)를 견지해왔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종교‘라는 일반적 개념이 아예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설령 그리스도교가 타종교를 운위한다손 치더라도 그 유일한 까닭은 계시에 근거하여 그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입장에 대해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가 발생한 것은 분명히 충격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에는 전통적인 카톨릭의 입장과 칼 바르트, 크래머와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속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배타주의는 구원이 예수에 대한 명시적 신앙 안에만 있다거나 교회 울타리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몇 가지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성경의 문자적 증언과 일치한다는 것과 그리스도 신앙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확립시킨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또한 선교의 열정을 강조하고 같은 맥락에서 협조하는 것이 배타주의의 긍정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배타주의는 은총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강조하지만 기독교가 아니면서도 은총의 종교인 예를 들어 아미타불교, 바티 흰두교와 같은 교리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한계점이 있다. 또한 창조계시와 그리스도 계시를 이분함으로써 창조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점을 간과하는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많은 선한 것에 대해 긍정적이고 바른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포괄주의는 자기 종교를 최 우위에 놓는 자기 중심적 요소가 있어 한편
으로는 배타주의와 통하고 우열을 가리면서도 남의 종교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다원주의와도 통한다. 현재 카톨릭에서 가지고 있는 공식적인 입장이다. 즉 포괄주의는 “발전–완성“이라는 도식의 성취설을 취한다. “타종교 속에 있는 모든 진리는 본래 그리스도의 것이다“라거나 “타종교에도 구원은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 는 등의 사상이 모두 포괄주의적 입장에 속한다. 타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으로 규정한 칼 라너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이후의 카톨릭 입장이 모두 이 견해를 대표한다. 포괄주의는 여전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론의 한계 안에 갇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원주의는 참 종교를 하나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을 인정한다는 입장이다. 즉 궁극적으로는 형언불가능한 하나의 신적 실재를 믿되, 그 신앙의 다양한 표현으로서의 다원종교 현상을 인정하며 그것들 사이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태도이다. 이는 교회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타종교들을 배타하거나 포괄하려는 종래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이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근대 후기의 종교다원적 세계 속에서 요청되는 신학적 사고의 모형변이가 신중심주의(Theocentrism)의 입장에서 종교의 다원성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교회중심주의나 그리스도 중심주의(Christocentrism)의 사고에 젖어 온 그리스도 신학은 타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타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쯤으로 포괄하는데 그칠 것이다.
따라서 80년대의 다원주의적 종교신학은 소위, ‘신 중심적 모델‘을 제시하며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궁극적 실제(ultimate reality)로서의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다원주의에 속하는 현대 종교 사상가로는 하버드 대학의 비교 종교학 교수였던 스미스와 인도의 신학자 사마르타, 인도의 카톨릭 신학자인 파니카, 남인도 뱅갈로 에큐메니칼 선교 센터 원장이며 1986년부터 1975년까지 W.C.C.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토마스, 영국 장로교 목사인 존 힉과 카톨릭 신자인 폴니터 등을 꼽을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이란 인간이 종국적 실재와의 관계에서 자기 삶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고 구원을 성취하는 양식에는 문화의 다양성에 따라 다양한 구원의 길과 종교 상징체계가 존재하며,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이름과 구원의 길의 다양성은 삶의 자리가 갖는 해석학적 제약에 기인하기 때문에 모두 상대적이며 특정 신의 이름과 구원의 방도가 배타적인 우월성을 지녔다는 주장은 용납될 수 없다는 종교신학적 이론이다.
1. 칼 라너 : 익명의 그리스도인
칼 라너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은 만민을 구원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시고 처음부터 구원하려는 사랑과 긍휼로 사람을 만나셨다는 것이다. 이점은 배타주의에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긍휼과 사랑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교되는 점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만민을 사랑하시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목되지 않았던 사람을 모두 지옥에 떨어뜨리고하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용서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용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사건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 라너는 자연과 은총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여기에 예외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율법으로 살아간다면 형벌로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 라너는 이런 의미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주장한다.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리고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은총을 안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은가? 라너가 말하는 익명이란 명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익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초월적 존재를 향해서 자기를 개방하는 사람들, 이웃을 향해서 자기를 열어 놓는 사람들, 선과 정의, 진리를 향해 그런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들이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은 구원의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은가 말하는 것이다.
칼 라너의 이러한 신학은 그리스도밖에 존재하는 은총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과 타종교와의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과 선교의 효과와 교회의 성장의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낙관주의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타종교에서 말하는 자력구원 의지, 역사 퇴행적 사고 행태 등은 중요한 부정적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타종교의 선한 것과 구원사이의 구분이 분명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정당하다면 기독교의 순교란 불가능하다는 결과를 이끌어 내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
2. 에른스트 트뢸취 : 역사적 상대주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종교사학자 트뢸취(Ernst Troeltsch, 1865-1923)는 그리스도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 상대주의를 주장했다. 하나님은 유한한 것들과 동일시될 수 없지만 신성도 역사 속에 주어졌을 때는 상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절대적 종교가 아니며,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그것의 환경을 구성하는 역사적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운, 전적으로 유일회적인 종류의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종교의 보편적 원리라고 생각되는 것의 분별적, 최종적, 무조건적 실현이 아니다. 다른 위대한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도 그 역사의 매순간에 있어서 철저히 역사적인 현상이며, 모든 개별적 역사현상이 직면하게 되는 모든 제한에 종속되어 있다.”
이처럼 그에게는 인간에 대한 절대적이고 유일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복음마저도 다양한 종교적 구원체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그의 철저한 역사적 의식과 그 역사적 의식이 요청하는 바 역사적 상대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절대자는 모든 역사를 향해 현존하고 모든 역사 안에 현시되지만, 그러나 절대자에 대한 그 어떤 역사적 현시도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절대자의 본질(절대자는 항상 유한자 이상이라는)과 모순되며, 역사적인 것의 본질(역사적인 것은 항상 제한적이고 가변적이라는)과도 모순된다는 것이다.